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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学铁评传翻译稿
添加时间: 2019-7-20 14:55:21 来源: 作者: 点击数:644

22. 추리구감옥

22秋梨沟监狱

와의 전쟁

“虱子”的战争

연길에서 장춘으로 가는 기차에 앉아 당시로는 네댓 시간가량 달리면 추리구라는 작은 정거장이 있다. 발해국 옛터이다. 이 정거장에서 다시 깊은 골 안으로 십여리 들어가면 추리구감옥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말로는 돌배골감옥, 관방 명칭은 돈화감옥이다.

从延吉出发开往长春的列车上,当时,大约走四五个小时就会出现一个叫秋梨沟的小型停车场,那是历史上渤海国旧址。从这个停车场出发,再往深山沟走十几里路会看到一个“秋梨沟监狱”,用我们的话叫野梨沟,官方称呼叫“敦化监狱”。

수감자가 모두 1천 명인데 정치볌(반혁명분자)이 백 명이 넘는 이 감옥에서 김학철은 나머지 형기 2년 8개월을 마주 치러야 했다.

被关押的人总共1千名,政治犯(反革命分子)一百多人,在这所监狱里,金学铁就要度过刑期中最后一段2年8个月的时光。

고된 노동을 해도 상여금은 없고 대신에 달마다 용돈이라는 지급이 되는데 과실범에게는 2원. 파렴치범에게는 1원 50전, 정치범에게는 1원씩을 각각 지급했었다. 졍제력이 사회적 지위를 졀정하는 세상인지라 절도범, 강간범들이 오히려 정치범을 깔보고 천인 취급을 했다.

劳动再怎么艰苦,也不会发给奖金,但每个月会给一定的零用钱,过失犯2元,反人道罪犯1元5,政治犯是1元。那是一个经济基础决定社会地位的时期盗窃犯、强奸犯反而瞧不起政治犯,把他们视为贱民。

, 내가 강간범으로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반혁명으로 들어왔더라면 어떡할 뻔했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야.

“呀,我还好是因为强奸入狱的,要是因为反革命进来的话不得了啊,想都不敢想啊!

이와 같이 자위 자축을 하는 놈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还有这种类似自我安慰自我庆祝的家伙。

김학철의 잡문 「이와의 전쟁」과 중편소설 「밀고제도」를 보면 중국의 감옥 생활에서 무엇이 제일 어려웠던가를 있다.

如果读了金学铁的杂文《和虱子的战争》和中篇小说《告密制度》,我们就会了解到中国的监狱生活里最折磨人的是什么了。

바로 이다.

那就是虱子。

우리 속담에 이가 칼을 썼다, 잡듯 하다라는 있는데 여기 나오는 .

我们谚语里有“虱子披枷带锁”“仔细的像抓虱子一样”就是这个虱子。

요즘 셈평이 좋아졌으므로 희구한 구경을 못한 젊은이들이 많으리라 생각해 죄송하지만 잠간 「새 우리말 사전」의 해석을 보기로 하자.

现在生活条件好了,我相信很多年轻人再也难见这样的稀有之物了,所以我们先来看一下《新国语字典》的解释。

이과에 딸린 곤충의 하나로서 사람의 몸에 기생한다. 몸길이는 수컷은 2.3mm 가량이고 암컷은 3.3mm 가량이며 몸빛은 회백색이다. 발톱과 정강이 마디의 돌리로 의복과 섬유애 붙는다. 암컷이 하루에 5-10개의 알을 낳는데 1주일에 부화하여 3회 탈피하여 피를 빨아먹는데 발진티푸스, 재귀열, 참호열등 전염병을 붙이고 다닌다. 벼록 따위와는 달라 기생한 몸으로부터 떨어지면 얼마 뒤에 죽는다.

虱科昆虫的一种,寄生在人体内。雄性虱子身长2.3mm,雌性虱子身长3.3mm,身体颜色呈灰白色。脚趾和胫骨有凸出的关节,附着在衣服和纤维上,雌性虱子一天平均产5-10个卵,孵化时间历时一周。蜕皮3次,吸吮血液后会造成斑疹伤寒,回归热,产后热等症状,携带传染病。和跳蚤不同的是,一旦离开寄生的身体,不久就会死亡。

추리구 감옥에서는 한해에 번도 목욕을 시키지 않았다. 목욕을 하는 설비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내 세탁소라는 것은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안팎 수의를 다 복역수들이 제 손으로 빨아 입어야 했다. 한데 예상 밖으로 그게 그리 여의치가 않았다. 감방동료들이 냄내 난다, 더럽다 종주먹을 들이대야 겨우 꼼지락거려 빨아 입는 시늉을 하는 녀석들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작해야 1년에 몇 번쯤이었다.

秋梨沟监狱一年都不让洗一次澡,也没有淋浴设施。监狱内干洗店这种地方当然是闻所未闻。所以内外的囚衣都是囚犯亲自搓洗,但这事没那么顺利。总有一些关在同一间牢房里的囚犯挥舞着拳头气愤地说太难闻了,真脏”,才勉强去洗一次。这样的情况一年内也没有几次。

그러니 그네들의 몸에 이가 득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양산해내는 온상들하고 배좁은 통칸(60명씩 수용하는 감방)에서 빽빽이 끼여서들 자야 하기에 때를 만난 들이 거침없이 넘나드는 바람에 제아무리 간수를 잘하는 놈이라도 없이 똑같은  꾸러가로 돼버리기 마련이었다.

所以他们这些人身上长虱子就不足为怪了。大家在大批生产这类虱子的温床和拥挤的大牢房(一间容纳60人)中生活,睡觉的时候,都挤得密密麻麻的,所以,只要有机会,这些虱子就会理直气壮地到处乱窜,把自己身体看护再好的人也无一例外的成为虱子的受气包。

감옥당국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터라 두어 달에 꼴로 이약이라는 잿빛 가루를 내주었었다. 그 잿빛가루를 몸에다 바르면 아닌 게 아니라 한 닷새 쯤은 그 극성스러운 들이 자취를 감추곤 하는 것이었다. 정말 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주일쯤 지나면 일시 피난을 갔다 돌아왔는지 어쨌는지 아무튼 모두 도로 아미타불이 돼버리곤 하였다.

监狱当局深知这种情况,两三个月给大家分发名为“虱子药”的灰色面粉。只要在身上涂抹这种面粉,大约5天左右,那个不要命的虱子就会消失得无影无踪,简直太神奇了,但是过了一周左右,不知道是一致去避难回来了还是因为什么,总之,徒劳无功。

추리구감옥 3중대 (정원 120명)에서 김학철에게 배경이 된 것은 정치범조 맨 끝의 자리었다. 한데 유감스럽게도 그 자리는 파렴치범조의 맨 끝과 서로 맞닿는 바로 접경선상에 위치했였다. 그리하여 김학철은 구태현의 농민 유사곤 (한족 30대 초반)하고 나란히 누워서 자야 했는데 그 자리란 게 어찌나 배좁았던지 자다가 한 번 돌아눕가도 힘이 들 지경이었다.

秋梨沟监狱第3中队(全员120人)里,能让金学铁得以依托的地方是政治犯组最里面的位置。遗憾的是那个位置正处于反人道犯组的边际,金学铁要和一个九台县的农民(刘士坤,汉族,30多岁)紧挨着睡由于睡觉的地方太狭窄了,想翻个身都困难。

유사곤은 후일 감학철의 단편소설 『죄수의사』에 조춘생이라는 인물로 나오지만, 무슨 병인가로 갓 죽은 동네 집 처녀를 테리고 살 욕심에 매장을 한 그날 밤에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업어온 죄로 징역 10년의 판결을 받았었다. 그러니까 정신이 온전치가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시기만 아니였던들 감옥으로 들어올 대신에 정신병원으로 갔어야 위인이다.

在金学铁的短片小说《囚犯医生》里,刘士坤是赵春生(音)的原型。他不知道犯了什么毛病,突然有一天村里一个刚刚死去的女孩儿掘坟背尸带回家来以后,被抓住判了10年刑,可以说精神不太正常。如果不是赶上文化大革命时期,恐怕他不应该去监狱服刑而是要去精神病院的人。

그런 위인더러 감학철이

金学铁对这个人说

찬물로라도 몸을 닦아라.

“哪怕用冷水泡泡澡吧”

제발 속옷 빨아 입어라.

“求你快洗洗内衣吧”

아무리 촉구해보았자 말귀에 염불이지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하물며 빨아 입을 속옷 자체가 없음에랴. 알몸에다 솜옷을 걸치고 긴긴 겨울을 나고 있음에랴. 그는 워낙 속옷을 차입해줄 사람 하나도 없는 고아의 신세였다. 이런 천하의 괴물딱지하고 근 3년 동안이나 찰떡같이 달아붙어 살자니 김학쳘은 냄새가 나고 온몸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不管他怎么敦促,都是对牛弹琴,一点都不管用。更何况根本没有内衣可洗。冬天的时候,无任何内衣可穿的情况下身上直接套上棉袄过冬。因为他是一个连棉袄都没有人给他缝制的孤儿。由于和这样的天下怪物一起过了近3年,金学铁实在是其味难闻,全身瘙痒

냄새가 나고 몸이 근질거리는 것은 그래도 약과다. 유사곤이 잡아먹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오장육부가 뒤집어진다. 중국의 무호 노신의 유명한 소설 『아Q정전』에 나오는 왕텁석부리는 잡아서 자끈자끈 썹어 먹거나 하고 깨물어 먹지만 류사곤은 온새미로 먹어버리는 아니라 피만 빼먹고 껍데기는 톡톡 뱉어버리는 것이었다. 흡사 해바라기 씨라도 까먹는 것 같은 그 속련되고도 또 재치 있는 입놀림, 한 마디로 그것은 절기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这点还真不算什么,要是目睹刘士坤抓虱子吃的场面,五脏六腑都会吐出来。中国文豪鲁迅有名的小说《阿Q正传》里不是描写过王胡咔嚓咔嚓吃虱子的情景吗?他是哧溜一下咬着吃,而刘士坤不是整个儿都吞下去,他只喝血,把皮都吐出去。就好像磕瓜子一样,真是嘴上功夫技艺高超,堪称一绝。

수의에 깃든 이야기

囚衣故事

수의(죄수복) 한 벌씩 얻어 입고 머리들을 빡빡 깎으면 외양으로는 진짜 가결수(전중이)들이 되는데 이 수의에 재미있는 사연들이 적지 않게 따랐다.

领一套新的囚衣,把头一剃,外表看起来活脱一个已决犯。在这个囚衣上还真有很多有趣的故事。

중국 감옥은 일본 감옥과 달리 침구(이부자리)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죄수들이 스스로 갖추어야 하고 또 속옷가지도 거의 지급은 안 하다시피 하는 까닭에 각자가 스스로 마련을 해야 했다.

中国监狱和日本监狱不同,不给提供寝具(被褥)需要囚犯自己从家带,内衣也几乎不予提供,所以都要自己准备。

무릇 죄수가 몸에 걸치는 옷가지에다는(속옷이든 겉옷이든) 다 페인트로 자를 찍는데 김학철이 입은 수의에는 네모꼴 안에 김학철 반혁명 현행범 징역 10년 이외 같이 눈에 띄게 한문자로 찍었었다.

所有囚犯身上穿的囚服(无论是内衣还是外衣)都印有“犯”字。金学铁穿的囚衣上有个四方形里面印着中文:“犯人金学铁,反革命现行犯拘役10年”的字样,赫然醒目。

녀석이 팬티에다도 커다란 자를 찍으니까

有一个家伙内裤上也有印着一个大大的“犯”字。

넨장, 맨 팬티 바람으로 도망칠 놈이 어디 있을 거라구.

“该死的,谁还能穿着内裤逃跑的呀

마디 투덜거렸다가 혼쭐이 났다.

嘟囔了一句,然后就受到了训斥。

만기 출옥을 앞둔 죄수들의 고민거리 하나는 스웨터 위에 더덕더덕 찍혀있는 자를 어떻게 지워버릴 건가 하는 것이었다.창피해서 도저히 그대로는 입을 수가 없는 오릇이었다. 간통죄로 2년 형기를 살고 있는 한 녀석이 머리를 쥐어짠 끝에 멋진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服刑期满即将出狱的犯人们最苦恼的问题是羊毛衫上一层又一层的“犯”字,怎么把它弄掉的问题,因为实在太丢脸了,根本穿不出去,有个因通奸罪服役2年的家伙绞尽脑汁,最后想出一个办法。

--옳지 그렇지, 사이나(시안)가 있지!

是的,有办法了,不有氰胺吗?

녀석은 며칠 작업장에서 사이나를 훔쳐내다가 스웨터에 발라서 원수의 자를 말끔히 지위버리는 성공을 하고 너무 좋아 어깨춤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를 못했다. 자가 지워진 만큼 스웨터도 함께 판이 났기 때문이다. 녀석은 넝마가 돼버리다시피 한 스웨터를 펼쳐들고 낙태한 고양이상이 되었다.

几天之后,那个小子从工作间偷来氰胺,涂到了羊毛衫上,那个讨厌的“犯”字终于成功擦掉了,他喜出望外,但没高兴多久,他发现虽然弄掉了“犯”字,整个羊毛衫也废掉了,不能穿了,他愁眉苦脸,眼睁睁地看着这个羊毛衫成了破烂。

김학철은 만기출옥을 더없이 좋은 기념이하고 그놈이 자들을 고스란히 챙겨가지고 나왔다. 나와서도 그 자들을 그대로 입었다. 하긴 새것을 살 돈도 없었다.

金学铁出狱的时候,认为这是最好不过的纪念品了,原封不动地把带着“犯”字的物品都带了回来。出狱以后,也穿着那件印有“犯”字的衣服,其实,想买件新的也没有钱。

김학철 부인은 빨래를 해서도 자들만은 빨랫줄에 내다 널지 못하고 따로 안에서 말렸다.

金学铁的夫人洗这些带有“犯”字的衣服的时候,也不能晾在外面的衣绳上,只能在家里晾干。

김학철이 만기출옥으로 귀가를 했을 겨우 다섯 달이 잡혔던 손자 녀석이 차차 커가며 말을 배우더니 하루는 동떨어진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金学铁期满出狱回家的时候,出生只有5个月的孙子一点点地长大,正在学说话,一天忽然说了句不着调的话:

할아버지 축구선수야?

“爷爷,你是足球运动员吗?”

추국선수? 아니, 갑자기 축구선수는 또 왜?

“足球运动员?不,你怎么突然说这个

그럼 이런 입었지?

“那为什么穿这种衣服?”

녀석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아버지의 앞가슴의 자를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녀석은 아직 글을 배우지 않았으므로 할아버지의 가슴과 등에 찍혀있는 자를 축구선수의 등번호로 오인을 것이다.

这个小家伙用(蕨菜般大的?)小手儿指着爷爷胸前“犯”字。问了才知道,这个小家伙还没有学写字,把爷爷胸部和背部上印的“犯”字误认为是背码。

집안의 한바탕 옷음판을 벌이는 것으로 일가졸은 쌓인 스트레스를 시원히 날려 보냈다.

一家人哄堂一笑瞬间家人所积压力减轻了许多。

추리구 감옥의 죄수복들이 공주령 여자 감옥의 여수들이 지어 보내는 것인데 징역살이를 하는 여자들이 조신할 리가 없는지라 심심풀이로 수의 속에다 실없이 글쪽지를 끼워 보내는 장난들을 곧잘 했다.

秋梨沟监狱的囚服都是公主岭女子监狱里的女囚做的,能在监狱过服役生活的女子品行也都不太端正。为打发时光,经常搞恶作剧,在囚衣里塞字条

--오매불망 못 잊는 내 낭군이시여 어쩌구저쩌구……

—我日夜思念的郎君啊如何如何……

이런 쪽지가 차례진 젊은 죄수 녀석은 좋아서 괜히 싱글벙글하지만

收到这样字条的年轻囚犯当然眉飞色舞,喜出望外。

--사랑하는 아들아, 이 엄마는 네가 보고 싶어 어쩌구저쩌구……

—我亲爱的儿子,妈妈想你啊,如何如何……

이런 쪽지를 받은 백발의 늙은 죄수는 대번에 (연기) 마신 고양이상이 돼버리는 것이었다.

一个白发老人收到这样的字条可气到不行。

지옥에도 옷을 일이 있는 법이니 추리구 감옥에서 김학철은 모진 역경과 시련을 이겨낼 있는 유일한 방법-낙천주의를 배운 것이다.

地狱里也有笑声。金学铁在秋梨沟监狱里服刑的岁月里,唯一能够克服这种逆境和磨难的就是这种乐观主义的精神。

밀고제도

《告密制度》

김학철이 자기의 옥중체험을 집대성한 것은 1987년애 발표한 중편소설 『밀고제도』 이다. 이 소설은 최저한도의 인권도 보장되지 않는  추리구감옥의 일상을 야유와 풍자의 필치로 그린 수작이다.

金学铁记录自己狱中生活集大成的是1987年发表的中篇小说《告密制度》。这篇小说采用了揶揄和讽刺的手法,描述了连最低限度的人权都不给予保障的秋梨沟监狱的日常生活

죄수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고역에 시달리고 이와 빈대의 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당국은 제한된 관리인원으로 수많은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해 파렴치하게도 상호감시, 밀고제도를 적용한다. 죄수들은 서로 감형을 받기 위해 동범을 물어먹고 온갖 모략과 중상을 일삼는다. 지금의 어느 지상낙원 어쩌면 이렇게도 같은가.

“囚犯”饱受饥饿之苦,受尽苦役的折磨,对虱子和臭虫的袭击还毫无防备。加上监狱当局管理人员有限,为了管制这么多的囚犯,他们采用了无耻的相互监视、告密制度。囚犯们为了争取减刑甚至找同犯的把柄,用尽各种阴谋诡计,专门诽谤别人。是不是和现在的“人间乐园”有点相似呢?

예하면 동범의 『모주석어록』을 훔쳐다가 거기의 있는 최고분(모택동) 초상의 눈을 멀게 하고 슬쩍 죄를 전가시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부러 탈옥모의를 하고는 뒷구멍으로 감옥 당국에 보고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고자쟁이는 오히려 감옥 당국의 믿음을 받고 모범죄수로 감형이 된다. 그야말로 타인은 나의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명제를 연상시키는 극한적인 상황이다.

比如同犯把《毛主席语录》偷走了,将上面“最高首领(毛泽东)”肖像画上的两眼涂画,做了手脚后,把罪责转嫁给同伙儿。还有的故意共谋越狱,然后偷偷把消息报告给监狱当局。这样的告密者反而得到监狱当局的信任,被称赞为模范囚徒,予以减刑。这种糟糕至极的情形不禁让人联想到萨特的一句至理名言:“他人即地狱”。

소설은, 죄수들의 마음눈에는 돌배골감옥의 상층구조가 철근 콘크리트 기둥으로 받쳐져 있는 아니라 수천수만 기수부지의 밀고장을 가려서 만든 기둥 위에 덩그러니 올라앉아 닜는 같다 했고 그것은 존엄한 헌법이 휴지처럼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린”’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사회의 축도라고 암시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주인공 허성민의 체념과 탄식을 통해 문화대혁명 별게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휩쓰는 일장의 온역이다!라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这篇小说中写道:“囚犯们的心中,这个秋梨沟的上层结构不是用混凝土柱子擎起来的,而是有那么多人在用数千数万张告密状累积的擎天柱上作威作福”。“宪法的威严尽失,如同手纸一样被扔到了垃圾筒里”,向我们暗示着这正是‘文化大革命’时期,中国社会的缩影。换句话说,通过主人公何成民(音)的绝望和叹息辛辣地嘲讽了文化大革命就是笼罩在人们精神世界的一场瘟疫。

소설이 무시무시한 인간지옥을 보여주면서도 독자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은 작품 속에 시종 관통된 참된 인간애와 정신적 불구와의 대결과 투쟁이요, 후자애 대한 전자의 승리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허성민은 기자출신의 지식인으로서 끝가지 인간적인 존엄을 지키며, 또한 그와 김철호라는 죄수의 주위에 뭉친 정직한 죄수들이 고자쟁이를 혼내준다. 특히 낡은 옥사 개축공사를 하다가 붕락사고가 났을 때 여러 죄수들이 보여준 인도주의와 헌신성은 인간성의 승리를 말해주고 있다.

这篇小说虽然为我们揭露了可怕的人间地狱,另一方面也展示了真正的人间大爱和顽强不屈,英勇对抗的精神力量给读者们带来希望,贯通于作品始终。因为后者正预示了前者的胜利。主人公何成民是记者出身的知识分子,始终维护着人性的尊严,与以金哲浩(音)为首的正直的囚犯们一道抨击了那些告密分子们。特别是在改造破旧狱舍的施工过程中出现崩塌事故时,囚犯们身上彰显出的人道主义精神和大无畏的牺牲精神更体现了人性的胜利。

낡은 옥사의 개축공사를 하는데 기술자격이 전연 없는 기술자명색이 사공 규정을 어기고 무모하게 일을 시켰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거부할 힘이 없는 죄수들은 마지못해 주추에서 불과 30센티 밖에 안 되는 곳까지 파들어 가다가 그예 필연적인 결과를 빚어내고 말았다. 옥사의 한 귀통이가 와르르 무너지는 바람에 땅을 파들어 가던 죄수들이 돌멩이에 치이고 흙속에 묻힌 것이다. 엎친 데 덮치기로 감방인 덕우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던 밤대거리군 죄수들이 공중제비로 날아 떨어져서 돌과 흙에 낄린 놈들을 또 덮치기까지 한 것이다.

在对破旧狱舍进行改造的过程中,这天,毫无技术资格证的施工人员违反了规定,鲁莽办事,导致了事故的发生。大家明知这样做很危险但无法拒绝的囚犯们迫不得已挖到了离桩基不到30厘米的地方,最终的结局可想而知。狱舍的一角瞬间轰隆隆土崩瓦解,施工的囚犯们被乱石砸到,埋在泥土里。原本囚犯们已被石土覆盖,祸不单行,牢房内还在酣睡的值班囚犯如空中飞燕一样掉下来,又砸在了上面。

허성민도 다른 조원들과 함께 간수의 지휘를 기다릴 사이도 없이 주먹 불끈 쥐고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사람이 당장 죽게 된 것을 보자 다들 제 정신 없이 달려들어 간당초롱 만큼씩 한 돌덩이를 낑하면 하나씩 들어내곤 하는데 어디서 그런 사천왕 같은 힘들이 솟아났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죄수들의 몸속에도 역시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何成民和其他组员一起,已经没有时间再听看守指挥了,紧紧攥着两只拳头直奔事故现场。人都要不行了,大家都已经顾不上自己了,纷纷出手将堆积的大石头一个个地搬下来,像大力士一样,也不知道从哪里来的力气。囚犯的身上也流动着人情的血液啊……

23. 철석같은 믿음과 사랑

23坚固的信念和爱情

운명적인 만남

命运的相见

1957년에 터진 반우파투쟁으로부터 강청 일당이 피고석에 서는 1980년대 말까지 김학철 일가는 그야말로 지옥살이와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다. 특히 김학철의 부인 김혜원이 당한 수모와 받은 고통은 그야말로 필설에 절한다.

1957年爆发的反右派斗争开始,到江青一党站在被告席上的20世纪80年代末,金学铁的一家每一天过的可谓是地狱般的生活。特别是给金学铁的夫人金惠媛造成的屈辱和痛苦真是罄竹难书。

1928년 음력 2월 20일 김혜원은 충청북도 부용리의 김씨 가문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살림은 가난했으나 자식 농사는 잘되어 김혜원의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하나씩 더 생겨났다. 김혜원의 부모님은 손바닥만 한 농토에만 의지해 살 수 없어 인천시 부평동으로 이사를 했다. 지금은 고층건물이 들어선 도심으로 되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인가가 드문 허허벌판이었다. 일가족은 땅을 파고 구들을 놓고 그 위에 막을 친 움막집에서 살았다. 그들은 죽물로 끼니를 때우면서 한 이불속에서 뒹굴었다.

1928年农历2月20日,金惠媛出生于忠清北道的金氏家族,是家中的长女。虽然家境贫困,生儿育女倒挺顺手,金惠媛下面又多了一个妹妹和一个弟弟。金惠媛的父母单靠几亩田地无法维持生活,后来搬到了仁川市的富平洞。现在那个地方高楼林立,但在当时是人烟稀少的荒原。一家人从地里挖土,搭上了火炕,在上面建起了窝棚。每天喝着米汤对付,全家盖一个被过日子。

김혜원은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다. 소끕놀이를 해도 책을 보고 글을 쓰는 놀음을 놀았다. 그런 광경을 보는 부모의 가슴은 무척 아팠다. 동내 어른들은 키워서 남에게 줄 여식을 공부시키서는 뭘 하느냐고 했지만 부모님들은 딸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부평에는 학교가 없었던 것이다.

金惠媛太想学习了,就算是玩过家家,也玩那种看书写字的游戏。看到这个场面的父母心里很难过。街坊邻居都说,以后要嫁人的人,让她学习有什么用,但是父母还是执意把女儿送回家乡读书,因为当时富平没有学校。

부용리 시골학교는 바람갈망도 되는 허술한 판잣집이었다. 그년와 같은 가난한 집 아이들로 교실은 콩나물시루 같았다. 허리에 칼을 찬 선생님이 교단에 서서 일본말로 강의를 했다. 일본글을 배우고 일본노래를 배우고 일본 천왕이 계신다는 동쪽을 향해 허리를 굽혀 반절을 해야 했다.

芙蓉里乡村学校是一所破旧的平板房,教室里挤得满满登登的都是穷孩子,讲台上授课的老师腰上别刀,用日本语讲课。学日语,唱日本歌,向日本天皇所在的东方弯腰礼拜。

후날 부모님과 동생들이 살고 있는 부평에도 학교가 생겨 김혜원은 다시 전학해 와서 국립소학교를 마쳤고 이어서 간호원양성소에 들어가 공부하고 서울대학교병원 내과병동 간호사로 취직을 한다.

后来,父母和弟弟妹妹生活的富平也有了学校,金惠媛又重新转学,上完国立小学,在护士培训学校学习,后来就职于首尔大学的内科病房。

  1945년 8월 광복이 되고 그 감격의 한 해가 저물 무렵 내과 병동에 30살 되는 청년 하나가 입원을 했다.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광채가 나는 두 눈, 하지만 쌍지 팡이를 짚은 외다리 젊은이였다. 김혜원은 그 젊은이를 강재지병으로 일본군에 나갔다가 한 쪽 다리를 잃고 돌아온 잔폐군인 쯤으로 알았다. 하지만 며칠 후 이 청년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1945年8月,正值光复,和平笼罩之时,快到年末,内科病房进来一位30岁的青年,五官清秀,两眼炯炯有神,但只有一条腿,拄着双拐。金惠媛只知道那个年轻人是由于强制征兵加入日本军,后来失去了一条腿,变成了残废军人。但是几天后才知道,这个年轻人不是一般人。

병상에 붙인 명찰로 보면 이름은 김학철, 그러나 후에 알기로 본명은 홍성걸이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중국 상해에 가서 반일테러활동을 했고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군으로 태항상에서 싸우다가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어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을 하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을 했다는 것이다.

病床上的名签上写的姓名金学铁,后来才知道本名叫洪性杰,为了祖国的独立和民族的解放,前往中国上海,参加反日袭击行动。毕业于黄埔军校,加入朝鲜义勇军,在太行山与敌人斗争过程中受了枪伤,成为了阶下囚,被送到日本的长崎监狱服刑,如今光复,回到祖国。

  김혜원은 못내 김학철을 존경하게 되었다. 차차 지내보니 김학철은 선생님과 같이 자애롭고 오빠와 같이 자상한 분이었다.

听到这个经历,金惠媛对金学铁不禁萌生崇敬之情,慢慢地相处更觉得金学铁既有老师般的慈爱,又有哥哥般的慈祥。

1947년 4월 24일, 능수버들 휘늘어진 대동강가 자택에서 김학철과 김혜원은 결혼을 했다. 김두봉, 해빈, 주세민, 김세광, 정율성, 김감 등 기라성 같은 조선의용군 전우들과 이태준 등 월북한 문인들이 찾아와 축하를 해주였는데 주례가 없는 결혼식은 간소했지만 화기가 넘쳤다. 특히 김두봉 선생은 은수저 한 벌을 선물했는데 6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김혜원 여사는 그 은수저를 간수하고 있다.

1947年4月24日,金学铁与金惠媛在蜿蜒的大同江畔的自家住宅里结婚了。前来祝贺的有(注:以下人名音译)金杜锋、韩彬、周世民、金世光、郑律成、金刚等著名的义勇军战友,还有李泰俊等南边过来的文人,虽然婚礼很简朴,没有主持人,但整个气氛非常温馨。特别是金杜锋老师把一对银匙筷作为礼物送给了金惠媛,60年间,她一直小心珍藏着。

그들이 자리 잡은 집은 안채와 바깥채가 따로 있는 집이었다. 광복 전에는 약방을 경영하던 한 자본가의 집이었는데 그 주인이 공산주의가 싫어서 남으로 도망을 가는 바람에 남에서 공산당 탄압을 피해 북으로 도망  김학철네 식구가 들게 되었던 것이다. 너를 뜰과 크고 밝은 기와집에서 김학철 내외는 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잠시나마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他们的房子很大,各有里间和外间。光复之前,这是一个经营药店的资本家的房子,后来,这个房主对共产主义产生厌恶之情,跑到南边去了。而金学铁一家为了躲避南边对共产党的打压,逃亡到北边,住上了这个房子宽敞的院子高大明亮的瓦房,让住在这个房子里的金学铁夫妻,他的母亲,大姑子等一家人享受了一段短暂而幸福的时光。

  김학철 내외는 어머니에게 갖은 정성을 기울였다. 청춘과부로 되어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해 자식들을 키운 어머님, 조국의 독립을 찾겠다고 이국땅에 가있던 아들이 포로가 되어 일본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자식 걱정에 가슴에 재가 앉은 어머님, 그 어머님을 호강시키는 게 김학철 내외의 꿈이었다.

金学铁夫妇全心全意地伺奉他的母亲。母亲年纪轻轻就成了寡妇,甘愿做牛做马拼命干活养儿育女儿子为了祖国的独立跑到异国他乡参加抗日,沦为俘虏被关在日本监狱期间,作为母亲内心沉重,十分惦念。能让母亲享受富贵荣华是金学铁夫妇的心愿。

무렵 김혜원은 평양의 적십자병원에 출근을 하였지만 아침저녁으로 시어머님의 밥상은 정성 들여 챙겼다. 시어머님 또한 딸과 같이 귀여워했고 시누이 역시 연하의 올케를 언니처럼 존경했다.

当时金惠媛在平壤的红十字医院上班,早晚给婆婆做饭,婆婆特别疼爱儿媳妇,大姑子对弟妹像对姐姐一样敬重。

김혜원은 평양에서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낼수록 남쪽에 두고 온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동생들이 그리웠다. 간다 온다는 말도 없이 야반도주를 해올 것이 아난가.

金惠媛在平壤越是衣食无忧,生活幸福,越是对南边的父母心怀愧疚而且想念兄弟姐妹们。那时他们连招呼也不打,就半夜逃出来了的。

때마침 친정아버님이 연락을 받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찾아왔다. 그때만 하더라도 남과 북 사이에 편지도 통하고 야밤을 타서 서로 오갈 수 있었던 것이다.

正好娘家父亲接到了消息,越过“3.8”线来到了平壤,那时,南北之间还可以通信,深夜时段还可以偷偷往来。

김혜원은 임신한 몸으로 친정아버님을 따라 결혼 처음으로 친정나들이를 했다. 1948년 한 해 김학철과 김혜원은 처음으로 별거하였다. 김학철은 일주일에 한 번 씩 편지를 보냈고 그녀도 정성들여 답장을 썼다.

金惠媛拖着怀孕之身跟着父亲回到了娘家,那是结婚后第一次回门。1948年金学铁和金惠媛第一次分居,二人平均一周一次书信往来。

부평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해양이다.

在富平产下的孩子就是金海洋。

행복은 짧고 고난은 것인가

难道幸福是短暂的,苦难是漫长的吗?

조선전쟁이 터졌다. 평양에서의 신혼살림도 잠시, 김학철 일자족은 서둘러 피난 가야 했다. 김학철내외는 어머니와 세살 된 아들을 고모에게 맡겨 떠나보내고 마지막 짐 챙길 때 김학철은 굳이 일본어판 『고요한 돈』상, 하권만은 꼭 가지고 가야 한다 했다. 김혜원은 두말없이 가방 속에 들어있던 소지풍들을 꺼내고 그 자리에 책 2권을 밀어 넣었다.

朝鲜战争爆发了,在平壤的新婚生活极其短暂,金学铁一家匆忙地奔波在避难的路上。拜托姑母照顾母亲和三岁的儿子,金学铁夫妇打算离开,最后收拾行李的时候,金学铁说一定要把日文版的《静静的顿河》上下卷带走,金惠媛二话没说,把包里的物品拿出来,留出位置将这两本书塞了进去。

그건 뭐지?

“这个是什么?”

김두봉 선생님이 결혼 주신 은수저예요.

“金杜锋(音)先生在咱们结婚的时候,送的银匙筷。

김혜원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소중하게 손수건에 싸서 가방 속에 묻는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부모님을 남에 두고 떠나온 이북 땅, 그런데 지금 또 정처 없이 어디로 떠나야 하는가.

金惠媛平静地回答,并将银匙筷小心翼翼地放在手帕里包了起来,眼泪在眼圈打转。离开留在南方的父母,来到了北方,如今居无定处,何去何从?

북경, 연변에서의 행복도 잠간이였다. 1957년 분우파운동 일어나자 김학철은 반동분자 지목되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18층 지옥에 떨어졌다. 어제까지 항일간부라고 존경을 받던 남편이 극악한 반동분자 뭇사람들의 지탄을 받을 김혜원이 받은 충격이 너무나 컸다.

北京、延边的幸福也是短暂的,1957年掀起了“反右派斗争”,金学铁被诬陷为“反动分子”,一夜之间就下了18层地狱,昨天还被奉为抗日干部,受到尊敬和爱戴的丈夫,一下子就变成了罪大恶极的“反动分子”,备受指责,对金惠媛来说,这个冲击实在是太大了。

정치적인 타격에 잇단 것은 경제적 타격이었다.

随着政治冲击而来的是经济的贫困

알에 7전씩 하던 계란이 불과 한두 달 사이에 60전으로 뛰어올랐다. 양배추는 2원에 한 포기가 아닌 반포기, 설상가상으로 김학철의 월급은 반으로 깎이어 홀 50원으로 돼버렸다. 그러니까 양배추 13포기 살까 말까한 돈으로 세 식구를 한 달 동안 먹여 살려야 했다.

原来平均一个鸡蛋卖7分钱,短短两个月内涨到了6角。白菜的价格由一棵2元变成了半棵2元,雪上加霜的是,金学铁的工资削减了一半,仅发50元,所以等于一个月拿着13棵白菜的钱养活3个人。

김혜원은 값이 나감직한 눈에 띄면 들고나가 먹을거리를 바뀌 들었다. 허구한 날 풀떼기로 영명을 하는데 그나마 어른들은 점심을 거르고 아들만 세끼를 먹이는 까닭에 김학철은 배가 훌쭉해져 점점 개미허리가 됐다. 김혜원은 남편보다 그 정도가 더욱 심해 아예 세요궁의 궁녀 꼴이 돼버렸다.

金惠媛一看到家里值钱的东西就拿出去,给大家换回吃的。很长一段时间,一家人靠着吃菜糊糊仅仅维持生计,大人一天只吃两顿,中午干脆就不吃了,留给儿子。所以金学铁变得瘦骨嶙峋,腰渐渐成了蜂腰。金惠媛瘦得更厉害,样子就像细腰宫的宫女。

피나무껍질로 떨을 해먹어 보기도 하고 무슨 나뭇잎을 빻아서 개떡수제비를 해먹어보기도 했다. 나중에는 마당에 자란 파마주를 따다가 맷돌에 갈아서 무슨 지짐을 지져먹으려다가 세 식구가 다 구역질이 나는 통에 못 먹고 내다버린 일도 있었다. 옹이에 마디로 엄동설한에 목슴을 걸고 사는 움 속의 김치를 어느 놈이 하긋밤 사이에 몽땅 퍼가는 바람에 세 식솔은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他们吃过椴树皮做的饽饽,还捣碎树叶,做糠饽饽面片汤。后来有一天在院子里摘了根蓖麻杆,放到石磨上磨,打算煎了吃,结果实在难以下咽,3口人一个劲儿地反胃,最后只能丢掉了。雪上加霜,有人把菜洞里的咸菜(白菜)全部盗走了,全家人陷入了绝望。

가까스로 길고 추운 겨울을 나고 봄이 되자 김혜원은 이웃에 사는 80세 고령의 노인을 따라 시내에서 10여 리 떨어진 어느 산자락에 가서 난생처음으로 콩을 심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몇 번인가 가서 김을 매주었다. 남편은 괜스레 헛수고를 하지하고 마음에 두지 않은 눈치었지만 가을이 되자 뜻밖에도 두어 되는 콩을 머리에 이고 돌아올 있었다. 한 절반은 깐 콩이고 한 절반은 꼬투리채로였지만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부부는 금세 큰 부자라도 된 것 같이 흐뭇해서 먹지 않은 배가 절로 부를 지경이었다.

好不容易熬过了漫长而又难耐的冬天,金惠媛平生第一次跟着隔壁80岁高龄的老人去离市内10多里的一个山脚下种大豆。夏天的时候,几次去那里拔杂草。丈夫说“不是徒劳无功嘛”,根本没有往心里去,到了秋天,意外地金惠媛头顶着两三斗左右的大豆回来,其中一半是豆荚,这下金学铁可乐坏了,这对夫妇像突然变成富翁一样欣喜若狂。

3년 후에 김학철의 월급이 다시 원상복귀 되고 또 번역이라도 해서 그럭저륵 생계를 유지하게끔 되자 김혜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젠 살게 됐나보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 다섯 해가 채 못 돼서 역사상 전례가 없는 문화대혁명이터질 줄이야! 남편의 옹군 10년 감옥살이가 기다릴 줄이야!

3年后,金学铁的工资重新恢复到原来的水平,加上从事一些翻译工作来维持生计,金惠媛这才心里有点踏实,生活有救了”。但是天有不测风云,还不到5年,谁知道会爆发“历史上前所未有的‘文化大革命’”!丈夫整整10年的狱中生活,等来了另一个大灾难。

폭도들은 후에도 여러 김학철네 집에 들이덮쳐 노략질을 해갔다. 이젠 완전히 알거지가 돼버렸다. 그야말로 세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이 없었다.

暴徒后来几次闯进金学铁家,强取豪夺。这时候金学铁一家真是变成了乞丐,家徒四壁。

처음엔 공중변소를 맡아 청소하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10전씩 위생비를 걷는 것으로 아들과 둘이서 연명을 했다.

金慧媛一开始打扫公厕然后挨家挨户去找,每户收取10分钱的卫生费来养家糊口

신세가 피여 맞벌이부부네 아이들을 맡아보게 되였으나 비정한 정치의 그림자는 여기에도 찾아왔다.

后来,家中的境况缓和了一些,就开始做双职工夫妇家孩子的看管工作,但无情的政治阴影再次找上门来。

——반혁명분자의 가족에게 사회주의의 소중한 꽃봉오리들을 맡기는 것은 혁명적 경각성이 부족한 표현이다. 어린아이들에게 반동사상을 전파하거나 독약을 먹여 죽일 수도 있지 않은가.

——把社会主义珍贵的花朵交给反革命家庭,这是缺乏革命警惕的表现,这不是等于给孩子们灌输反动思想或毒药而致死的嘛

맡아볼 아이들이 없어진 김혜원은 아들하고 둘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채소농장에 날품팔이로 들어갔다. 일은 고되어도 반혁명분자의 가족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 마음만은 편했다. 그러나 날품팔이는 일거리가 없으면 해고당하기 마련, 이른바 계절노동자였다.

看管的孩子们都跑掉了,无奈之下,金惠媛和儿子两人为了维持生计,到蔬菜农场里打工。工作虽然艰苦,但听不到有人叫他们反革命分子,这下心才舒服许多。但是如果没有活儿了,就会被解雇,也就是季节性的劳动者。

김혜원은 부득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직업을 바뀌다. 벽돌공장의 날품팔이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엄동설한이 되면 벽돌공장도 조업을 단축함으로 날품팔이꾼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가야 했다.

金惠媛迫不得已从农场转移到工厂上班,到了一家砖瓦厂打工,可数九寒天的时候,工厂就减少了作业量,导致工人纷纷下岗,再谋生计。

살길이 막막한 김혜원은 염마청만큼이나 섬뜩한 공아국을 찾아갔다.

前路茫茫,走投无路之下,金惠媛找到了公安局,在当时,公安局是像阎罗殿一样的可怕存在。

입에 거미줄이야 치게 수는 없잖습니까.

“天无绝人之路吧。”(意思是人活着总的要有吃的,或者不能饿着

공안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김혜원네 살림형편을 뒷조사해보고 씻은 부신 듯한 적빈임을 확인한 정도로 구차할 줄은 미처 몰랐다. 새삼스레 놀라며 신흥가판사처에 소개장을 써주었다. 직업을 알선해주라는 내용이었다.

公安局对金惠媛的话半信半疑,偷偷地派人对金惠媛的家庭状况做了调查,惊讶地说道“真不知道你们家居然困难成这个样子”,给新兴街道办事处写了一封介绍信,内容是希望帮忙找工作。

그때 마침 연길시 신흥가에서는 가도공업으로 비누공장 하나를 세웠었다. 그러나 반혁명분자의 가족을 받아들여 일을 시키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혁명적이고 프롤레타리아직이었다. 그들의 혁명적 경각성은 공안국보다 훨씬 높았던 것이다. 하긴 다른 직공들이 반혁명분자의 가족과 접촉하기를 꺼린다는 이유도 없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하남에 있는 도자기공장에다 소개장을 써줘 마치 역신마마를 배송하듯 김혜원을 따돌린 것이다.

当时恰逢延吉市新兴街道有一个肥皂工厂刚刚建成。此时工厂的革命性和无产阶级觉悟空前高涨,他们的革命警惕性比公安局还要强,他们不可能接收反革命分子家庭进来工作。职工还是不太愿意和反革命分子家庭接触。他们便给河南(延吉市河南)的一家陶瓷厂写了封介绍信,象送走瘟神一样把金惠媛打发走了。

다행이도 가도 비누공장은 망하고 도자기공장은 국가경영으로 수십 잘도 돌아갔다.

幸运的是肥皂工厂很快倒闭了,而陶瓷工厂是国企,数十年间经营得都很好。

김혜원은 공장에서 삽으로 도토, 백토 따위를 삽으로 퍼서 담고 퍼서 넣는 일을 밤교대 낮교대 일주일씩 바꾸어가며 칠판년 동안 잘 했다. 남편 이 만기 출옥을 하고도 또 3년 뒤에 다시 열린 공판정에서 무죄선고를 받을 때까지 줄곧 그 일을 했다. 정년이 돼 쫓겨날까봐 나이를 속이고 54세까지 그 일을 했다. 그러게 나중에 정년퇴직수속을 할 때 인사계장이 놀라서 논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金惠媛在陶瓷厂工作的内容主要是将陶土、白土之类的泥土用铲子撮起来,填土,倒土。白班晚班交替,周周如此,七八年间干得都非常出色。在丈夫期满出狱之后的第3年接受公审得到无罪判决的结果为止,一直从事这个工作。到了退休年纪,金惠媛怕自己被赶走,就隐瞒了年龄,54岁的时候还在工作。后来在办退休手续的时候,负责人事的领导发现了这个情况,惊讶地目瞪口呆,连连摇头。

멀쩡한 28년생이구먼. 여태껏 속았구먼!

“居然是28年生啊,居然骗了我们这么久!”

김혜원은 출근을 하랴, 집안 살림을 하랴…일 년 열두 달 삼백예순날을 부지런히 뛰어다녀야 하는데 공장이 멀어서 출퇴근에 시간을 굉장히 잡아먹혔다. 하여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늦깎이로 자전거타기를 배웠다. 그리고 죽어라 열심히 일한 결과 고정공으로 정식채용이 됐다. 50이 다 됐을 때의 일이다.

金惠媛既要上班,又要照顾家里,一年12个月360多天马不停蹄地奔波,工厂离家很远,上下班要花很长时间,50岁的年纪,起步虽有些晚,还是学会了骑自行车。皇天不负有心人,金惠媛终于有一天被转为正式职工,当时已经是50多岁了。

어머니가 혼자 고생하시는 것을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아들 해양은 진학을 포기하고 화학비료공장에 들어가 운탄공이 됐다.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 내였다.

母亲受罪的情形笼罩在儿子的心中,金海洋放弃了上学,到化学肥料工厂当起了运炭工。无论怎么劝阻也不能改变儿子的心意。

방정맞게도 화학비료공장과 도자기공장은 쌍동이처럼 서로 달라붙은 이웃이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대학에를 갈 대신 굴뚝 속에서 빠져나온 괴물처럼 세까맣게 돼가지고 온종일 석탄하고 씨름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가슴에는 피눈물이 고였다.

碰巧化学肥料工厂和陶瓷工厂是左右邻居。金惠媛唯一的儿子,没能去大学念书,反而终日在和煤炭打交道,像怪物一样,黑得不成样子。每当看到儿子这样,作母亲的内心仿佛在滴血。

김학철 옥중서한

金学铁的狱中书信

김학철은 추리구감옥에서의 옥살이를 가족에 대한 믿음으로 지탱하였다.

对家庭一如既往的信任,是金学铁能够熬过牢狱生活的心灵支撑。

부자간이 계급계선을 가르고 서로 원수 취급을 하던 세월, 백년해로를 맹서한 부인 또는 남편이 서로 상대를 물고 늘어지던 세월, 김학철의 일가족 셋은 그런 족속들과는 격이 달랐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믿었고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했다. 그것이 바로 김학철이 인간승리의 신화를 창조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那个年代,父子之间都划等级界限,互为仇敌。誓约百年之好的夫妇最后反目成仇,互相伤害。金学铁的家庭和他们截然不同,父子互相信任,夫妻相互疼爱。这就是金学铁能够创造人间胜利神话的基础。

추리구감옥에서는 달에 , 매달 초하릇날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

在秋梨沟监狱,一个月平均可以寄一次信,时间在每个月的月初。

아래에 아들에 대한 사랑과 기대, 부인에 대한 죄책김과 감사의 마음이 구구절절스며 있는 김학철의 옥중 서한 3통만을 보기로 하자.

下面就是金学铁在狱中的3封书信。书信中字里行间表达出对儿子的爱与期待,对妻子的愧疚和感激。我们来一起看一下。

해양:

海洋:

천연색 광폭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 원어판을 보았다. 이국의 하늘맡에서 귀전을 울리는 우리말에 야릇한 향수를 느끼였다. 원수의 분계선 한 많은 철조망에 올해에도 또 긏은비는 오겠지? 우리 민족의 비극은 강산이 세 번을 변하여도 끝날 줄을 모르는구나!

我看过了朝鲜原版影片《金熙和银熙的命运》,是黑白的大屏幕电影。在异国的天空之下,我们祖国的语言回想在耳边,像香水一样美妙。今年阴冷的雨水似乎又要淋湿在这个敌我3.8线的铁丝网上了。江山更替,岁月变换,可我们民族的悲剧似乎无休无止。

『인민일보』 1976년 3월 11일 제6면에 실린辛平 문장 驳新沙皇的国际工厂联盟论』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문장을 스크랩해서 내 서류 대에 넣어두어라. 거세찬 시대의 흐름에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秋梨沟에서의 세월은 허송되지 않을 것이다.

我读了《人民日报》1976年3月11日第6面上刊登的辛平的文章《驳新沙皇的国际工厂联盟论》,受益匪浅。你把文章剪下来,放在我的文件袋里,我得努力不被这个时代淘汰,不虚度在秋梨沟的岁月。

삼월 초에 연속하여 삼가일동안 새벽 시에서 다섯 사이에 동쪽 하늘에 혜성 꼬리별을 보았다. 장광이더라. 실물을 육안으로 보기는 이번이 육십 평생에 처음이다.

三月初有连续三四天的时间,早上四点到五点之间,在东边的天空上,我看到了彗星,也就是扫帚星,特别壮观。用肉眼看到,这是生平第一次。

『노신전집』 6권과 艾思奇 철학강좌책을 부쳐 다구. 내가 현재 쓰고 있는 원주필(대중 6001)에 맞는 규격의 油管서너 개를 부치되 좋기는 남색보다 흑색이 더욱 좋다. 그리고 塑料袋두어 개를 함께 부쳐라.

《鲁迅传记》第6卷和艾思奇的哲学讲座书给我邮过来吧。我现在用的圆珠笔(大众6001),找到规格相符的笔芯,三四个左右就行,黑色比蓝色更好一些,再邮两三个塑料袋。

무슨 신간서적들이 나왔는지 알리기나 하여라.

如果有新刊书籍发行的话要告诉我。

나가는, 날까지 노동일을 만출공 것으로 내다본다.

我要在出狱之前,把时间排得满满的,度过一个特别充实的时光。

전망은 밝다.

前景光明。

학철

                                일구칠육년 사월 일일

                                  学铁

  1976年4月1日

혜원:

惠媛:

삼십년 이달 스무 나흘 대동강변 경제리에서 맺어진 인연은 곡절 많은 삶의 흐름을 이루고 때로는 흐려졌다 때로는 맑아졌다 꾸준히 줄기치게 흘러내렸습니다. 은혼의 여울목은 이미 지났고 금혼의 나루터는 아직 멉니다. 앳되던 당신의 얼굴에는 연륜의 거미줄이 희미하게 얽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에 푸르싱싱 자라나는 후대들을 봅니다. 부푼 희망 속에 기대에 찬 눈으로 푸르싱싱 자라나는 후대들을 봅니다. 삶의 흐름은 앞으로도 의연히 밤에 낮을 이어 흐르고 또 흐르고 자꾸만 흐를 겁니다.

30年前的这个月的24号,我们在大同江边镜斋里喜结连理,生活同甘共苦,日子就这样过来了。银婚的浅滩已然跨过,金婚的渡口还未抵达。你稚嫩的脸蛋上已经印下了岁月的皱纹。但是看我们眼前成长起来的后代子孙,注视着在希望中茁壮成长起来的孩子,生活的脚步依然会昼夜变换,永不停息。

이른 종다리의 희열을

늦가을 기러기의 적막을

아울러 가슴에 안겨주신

조선의 어엿한 혜원 여사께

삼가 글을 바치옵니다

삼가 글을 바치옵니다

早春百灵鸟的喜悦

晚秋大雁的寂寞

同时在我心中深藏的是

朝鲜的女儿窈窕淑女

我敬爱的金慧媛女士

向你

献上我几行文字

献上我几行文字

학철

                              일구칠칠년 사월 초하루

                          산에 둘린 몰에 둘린 추리구에서

学铁

 一九七七年四月初

写于被群山碧水环绕的秋梨沟

海洋:

대신 네가 对外友好协会副会长丁雪松에게 편지를 내여 남편 郑律成 별세 한데 대하여 애도의 뜻을 표했으면 좋겠다. 丁雪松 너를 어려서 안아주었다. 그의 딸 小提 너는 姐姐라고 불렀었다. 郑律成 一九三七年 南京시절부터 나와 같이 어려운 일을 해온 친구다. 항일전쟁의 战火속에서 맺어진 우의는 해방후 조선에 나가서도, 그리고 또 다시 중국에 들어와서도 변함없이 이어졌었다. 내가 조선인민군 신문가의 주필로 일할 때 郑律成 조선인민군협주단의 패기 있는 젊은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오늘 옥중에서 신문을 통하여그의 접하게 되니 감화가 무량하다. 四十年 故友들이 하나 하나 떠나가누나. 朱德海 가버린지도 어언 다섯해, 내가 래년에 나가서 알아보면 아마도 杜甫 그의 《八处士》에서 《故朋半为鬼》라고 탄식한 것처럼 친구들이 한절반쯤 영영 돌아오지 못할 황천의 길손으로 되였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세월의 흐름이 거세차냐 아니면 야속하냐, 갈것은 기어이 가고야 말고 올것은 기어이 오고야 마는구나. 하지만 《解放军进行曲》 <조선인민군행진곡>의 용장한 선률이 울려 퍼질적마다 사람들은 그 작곡자  郑律成 회상할 것이다. 따라서 그도 역시 그의 불후의 예술과 더불어 옐 리브 还活着 것이다.조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또 하나 떠나갔다. 충직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자가 또 하나 떠나갔다.

替我向对外友好协会副会长丁雪松写一封信,对她的丈夫郑律成先生的离世表示深切的哀悼。丁雪松在你小时候曾经抱过你呢,你管她的女儿小提叫姐姐,我和郑律成在1937年南京时期曾经共同度过了艰难的岁月,他是我的老朋友了。我们的友谊,从抗日战争的战火中结下,无论是解放后去朝鲜,还是去中国,都一成不变。我在担任朝鲜人民军新闻社的主编时,郑律成是朝鲜人民军乐队合奏团的团长,是一个非常有魄力的年轻人。今天我在狱中看到了他离世的噩耗,无限感怀。40年的老朋友们一个一个地离开人世了。朱德海去世也有第五个年头了。我明年出狱后打听一下的话,可能正如杜甫《八处士》中《故朋半为鬼》一文一样感叹,老朋友们可能有一半左右都离开人世,奔向了黄泉之路。岁月是奔流不息还是冷酷无情,该来的来,该去的去。但是《解放军进行曲》和《朝鲜人民军进行曲》的旋律回响起来,被广泛流传的时候,人们就会想起作曲家郑律成的。所以他和他不朽的艺术与世长存。朝鲜又一位引以为豪的儿子离开人世了,又一位正直的无产阶级国际主义者离开人世了。

学铁

                                        一九七六年十二月二十六日

秋梨沟监狱

편지와 카렌다 받았다.

收到信和日历了。

한편 연길에 있는 아내와 아들의 마음속에도 김학철선생이 시도 떠나지 않았다. 김혜원은 아들 눈길을 피해 추리구 쪽 밤하늘을 향해 눈물을 흘렸으며 아들 또한 엄마 몰래 가슴이 아팠다.

在延吉的妻儿心目中,金学铁一直都没有离去,金惠媛避开儿子的目光,对着秋梨沟监狱的方向拂泪。看到这个,儿子也倍感心痛。

김학철은 후일 『집사람과 나』라는 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金学铁后来在“妻子和我”的随笔中这样写道:

집사람은 특징이라는 없는 여자보통 여자다.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잡목처럼 눈에 띄지 않는 여자다. 그러나 칠전팔기하는 끈덕진 성질과 온화한 성정을 아울러 지닌 여자다.

“妻子没有什么特别的地方,是一个极其普通的女人,像随处可见的杂木一样,很不起眼,但是她身上兼具顽强的韧劲和温和的个性。

집사람이 눈에는 양귀비보다 예뻐 보이고 성모 마리아보다 어질어 보이고 다르크(프랑스 애국소녀)보다 더 용감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성춘향찝 쩌먹게 곧아 보이기까지 한다.

妻子在我眼中,比杨贵妃要美丽,比圣母玛利亚要善良,比圣女贞德(法国爱国少女)还要勇敢,甚至还有成春香的坚韧与正直。

내가 집사람 앞에서 꼼짝을 못하고 쩔쩔 매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这就是为什么在我妻子面前我特别老实,唯命是从的原因。

24.  65세, 인생을 다시 시작하자

24. 65岁,人生重新开始

만기출옥

期满出狱

1977년 12월 19일 오전, 십년의 기나긴 세월을 넘어 드디어 출감의 날이 다가왔다.

1977年12月19日上午,经过十年的等待,终于迎来了出狱的日子。

 김학철의 출감을 아들 해양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对金学铁出狱的经历,儿子海洋是这样描写的。

눈으로 뒤덮인 산과 들이 유연히 펼쳐진 망망한 벌판. 추리구의 겨울 풍경은 적막하기만 하다. 한 손에는 감방에서 주섬주섬 싸고 나온 짐 보따리를, 다른 한 손에는 십년만기 출옥하신 외다리 아버지를 부축하고 나선 감옥 밖의 모습의 인생의 흐름을 멈추어 세운 듯한 하나의 정지된 사진과도 같았다. 정거장까지는 십리 길인데 버스도 자동차도 없는 시절이다. 다행이도 그쪽으로 가는 평판마차가 있어 사정을 하였더니 쾌히 앉혀 주었다. 평판마차란 두 바퀴 위에 달랑 널따란 널빤지만 깐 마차이다.

山林川原,白雪皑皑,茫茫的原野,一望无际,秋梨沟的冬景真是无限荒凉,一手拿着的是收拾整理好的包裹,一手扶着十年满期出狱的一条腿的父亲。出狱的情景仿佛人生的画面瞬间定格了,宛如一张静止的照片。到停车场要走十多里路,那个时期,没有公交,也没有汽车。还好有平板马车,说明了情况后,车夫很痛快地答应了。平板马车指的是在两个轮子上面加上宽敞的木板,跑起来会发出叮叮当当的声音。

외다리를 토시고 덜컹거리는 마차 우에 않으신 아버지는 천천히 밀려오는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눈빛이 반짝이셨다. 자유가 즐거우신 모양이시다. 문화대혁명의 십 년간 옥살이를 마치시고 외롭게 옛 만주 벌판을 헤쳐 가시는 그의 나이는 62세.

盘着一条腿坐在不断发出咯噔咯噔声响的马车的父亲,静静地望着缓缓推移的山峰,目光闪烁,面露重新获得自由的喜悦。当他结束了文化大革命十年的监狱生活,孤独地踏上从前满洲的大草原时,已经62岁了。

무서운 북방겨울치고는 유난히 따스한 날씨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겨울의 햇빛이 정답게 반겨주었다. 외로운 출감의 쓸쓸함과 자유의 기쁨이 뒤섞여 조화를 이루었다.

虽然正值北方的冬天,但那天的天气格外地温暖。一丝风也没有,冬日的阳光友好地打在他的脸上,出狱的悲凉和自由的喜悦交织在一起。

자유란 무엇이기에, 그를 위하여 생명도 바칠 수 있을까!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저 밀려오는 산봉우리처럼, 저 밀려가는 산봉우리처럼, 조선의용대 전우들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 싶은 욕망, 자유의 불씨를 심어주신 그 시대 선배들의 신념을 이룩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하여야 할 책임감이 격정시대 잉태하였다.

自由是什么,能让人为了它肯舍弃生命,为了祖国的自由、人民的自由付出生命的朝鲜义勇军战友们,如同远去的山峰一样,逐渐消失在历史的长河里。那个时代,先辈们撒下了自由的火种,想为他们做些什么的强烈欲望,想实现他们的未竟之业的责任感,让《激情时代》这本书应运而生了。

동지가 내일모레라 본래 짧은 북국의 해가 짧을 대로 짧아져 캄캄한 밤중에야 집이란 데를 들어서니 부인의 이마에 집힌 주름살이 김학철의 눈에 밟히었다. 그 주름살들은 반혁명 가족의 장기간 겪은 인간 이하의 고생살이의 하나하나이었다.

北国的日头原本落得就比较早,金学铁深夜才到家,映入眼帘的是妻子额头的皱纹,这个斑斑皱纹印刻了反革命家族长期以来经历的苦难生活,悲欢离合。

산이 첩첩해도 천리의 꿈을 가리지 못하고

山叠未遮千里梦

달은 높이 결려 고을의 마음을 비춰준다

月高相照两乡心

전기철조망으로 둘린 감옥 안에서 밝은 밤이면 떠울리는 한시였다.

这是狱墙之上,层层铁丝电网环绕,无数个月明之夜常常浮现在金学铁眼前的诗歌。

원래 살던 넓은 집에서 쫓겨난 가족은 됫박만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다. 다섯 달이 아직 채 되지 않은 젖먹이 손자가 기저귀를 차고 반듯이 누워서 토실토실한 팔다리를 쉴 새 없이 놀리고 있는데 그 모양이 흡샂 잦혀놓은 거부기 같았다. 늦장가를 간 아들에게서 새 생명이 태어난 것이다. 어린 손자를 안고 부인을 되돌아보는 순간 김학철은 가슴이 찡해났다. 부인은 혼자서 며느리 맞고 손자 보느라고 너무너무 고생을 해서 핏기 없이 마르고 핼쑬해졌다. 미안하다는 생각과 연민의 정이 김학철의 가슴을 때렸다.

从原来住的地方被驱逐出去以后,金学铁一家住在一间很小(小的如同水瓢之意)的屋子里。孙子还是不到5个月的婴儿,垫着尿布,平躺着,胖乎乎的胳膊小腿儿一个劲儿地蠕动。那个样子像翻了壳的乌龟。儿子娶妻比较晚,后来,迎来了新生命。金学铁抱着孙子,回头望着妻子的一瞬间,心里阵阵酸楚。妻子自己娶儿媳妇,自己照顾孙子,受尽辛苦,脸上无一丝血色,苍白消瘦。对妻子心生无比的愧疚和怜悯之情。

뼈와 가죽만 남은 집사람이 꾸려놓은 살림은 어찌나 넉넉했던지 손자를 업어도 두르고 나갈 담요가 없었다. 그래도 세 식구가 다섯 식구를 늘어나 한 자리에 둘러앉게 된 것만도 다행이었다.

瘦成皮包骨的妻子等一家人过得日子很苦,背孙子的时候连一条裹在外面的毛毯都没有。从3口人变成了5口人,一家人能够生活在一起,就已经是万幸了。

무죄판결 공포대회

无罪判决 公布大会

김학철은 만기출옥을 뒤에도 웅근 3년 동안 반혁명전과자라는 고귀 , 신분으로 실업자 대열에 서게 되었다. 이는 또한 조선의용군 전우요, 그 당시 만족사무위원회 주임인 문경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하여 그가 특별한 교분을 가지고 있는 당시 중앙서기처 서기 호요방에서 부탁을 해서 일이 풀렸다. 모택동이 서거하고 그의 처 강청 등 4인방 체포된 후의 일이다.

金学铁期满出狱的3年里,以“反革命前科分子”的这种‘高贵’的身份加入了失业者的行列文正一是朝鲜义勇军的战友,当时任民族事务委员会主任,他得知金学铁的近况,很是心痛。他托付和自己特别有交情的时任中央书记处书记的胡耀邦以后,问题才得到解决。那已经是毛泽东逝世之后,他的妻子江青“4人帮”被捕之后的事情了。

1980년 12월10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급인민법원 형사심판 1처에서는 연변문련 핵입자에게 연락했다. 당시 연변문련 주관인 상임부주석 왕유(王维 중국인)는 비서장 조성일(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현임회장)에게 자신은 조선말을 잘 모르니 가보라고 했다.

1980年12月10日,延边朝鲜族自治州中级人民法院刑事审判一处联系了延边文联的负责人。当时延边文联的主管常任副主席是王维(中国人),他跟秘书长赵成日(延边朝鲜族文化发展促进会现任会长)说自己不会朝鲜语,让他前去参加。

법원의 관계자의 말인즉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는 엄중한 정치문제가 있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출판이 되지 않은 작품이기에 무죄판결로 결정 났습니다. 무죄판결 공포대회는 이 달 15일에 하게 되는데 이미 주당위 선전부에 알렸습니다. 대회는 크게 하지 않고 작은 범위에서 하기로 하였으니 연변문련에서 협조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무죄석방 공포대회 전까지 이 일을 비밀에 부쳐주십시오.

用法院相关人员的话来说,“金学铁的小说《20世纪的神话》存在严重的政治问题,但因为尚未出版,所以判定无罪。无罪判决的公布大会定于这个月的15日召开,这件事已经告知州党委宣传部了。大会没有很大规模,只有少部分人参加,所以希望延边文联协助。并嘱咐在无罪释放公布大会召开之前对此事保密。

조성일은 법원 쪽의 지시정신 왕유에게 회보하고 주위 선전부에 물어보았더니 중급인민법원의 지시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赵成日将法院方面的“指示精神”向王维汇报后咨询州委宣传部,宣传部说是按中级人民法院的指示照办。

이제는 김학철 본인에게 통지해야 하는데 왕유는 조성일에게 김학철 댁에 가라는 것이었다. 조성일은 은근히 고민했다. 김학철은 참으로 억울함을 당한 대작가인데 나 같은 소인이 가서 전달하는 것이 옳을까? 하여 조성일은 왕유가 직접사거 이 중대한 문제를 본인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지만 왕유는 언어 소통문제를 이유로 기어이 조성일을 보냈다. 한데 극적인 내막은 왕유와 김학철은 서로 집을 길 하나 사이 두었는데 강둑에서 산책할 때 많은 속심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여서 벌써 귀띔을 한 상황이었다. 반우파운동 시기와 문화대혁명의 시련 속에서도 인근의 주덕해, 전인영, 왕유네 몇몇 가정만이 김학철가정에 등 돌리지 않았다. 세상사가 험한 것만은 아니었다. 왕유가 너무 일찍이 타계하였을 때 김학철을 슬픔을 금하지 못했다.

现在应该通知金学铁本人了,王维让赵成日去一趟金雪铁的家,对此,赵成日有点犹豫。因为金雪铁是饱受冤屈的大文豪,我一个无名小卒去传达合适吗?赵成日表达了自己的苦恼,劝王维直接去办理这个重大之事,但是王维以语言不通为由,最后还是让赵成日去了。实际上王维和金学铁家离得很近,中间有一条路,平时两人常在一起江堤散步,是推心置腹,无话不谈的关系。所以无罪判决一事已和金学铁打过招呼了。在反右派斗争时期和文化大革命时期,只有附近的朱德海、全仁英(音)、王维等几个家庭没有和金学铁断绝关系。世事并不都是险恶,王维过早离世时金学铁悲痛欲绝

조성일은 한가지만은 당당했다. 문화대혁명 전이나 문화대혁명 기간에 자신은 김학철에게 부끄러운 일을 조금도 적이 없었다. 조성일은 당시의 상황을 그의 「무죄석방공포대회에서의 김학철」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赵成日只有一件事让他觉得问心无愧,无论在“文化大革命”之前还是之后,没有做过一丁点对不起金学铁的事。赵成日把当时的情况记录在《无罪释放公布大会上的金学铁》一文中,内容如下:

나의 기억으로는 당시 김학철 선생의 댁은 10평방미터 되나마나한 콧구멍만한 단칸방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냉방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들어서니 부뚜막을 지키고 있던 김학철 선생과 부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어디서 왔는가 묻는 것이었다. 내가 문련의 아무개라고 자아소개를 하니 김학철 선생이 특유의 강원도말씨로

在我的记忆中,金学铁先生的家不到10平米。进去之后,发现真是和冷仓没什么两样。看到我来,还在锅台边上的金学铁和他夫人很是惊讶,问道:您是谁啊?我做了自我介绍,称自己是文联的某某,金学铁先生用自己特有的江原道口音说道:

……알만해, 여기 앉어, 무슨 일로 왔지?

‘哦……,有点印象,有什么事情?’

내가 사유를 얘기하고 무죄석방대회를 한다는 소식을 알리자 김학철 선생은

我说明了来由,告诉他无罪释放大会的消息,金学铁先生说

나는 날이 줄을 믿었소. 비록 늦기는 했지만……

‘我知道这天终究回来的,虽然有点迟了……’

라고 말끝을 흐리시었다. 한참 지나서 김학철선생은

话尾含糊不清,过了一会儿,金学铁先生说

무죄선고대회를 하려면 문화궁에 지난번 공판 때와 같은 규모로 1300명을 모여 놓고 개정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불참이요. 아니면 차라리 결석재판을 하시오.

‘无罪释放大会要召开的话,和上次文化宫的规模一样,召集1300人开庭,如果不这么做的话,我就不参加了,要不干脆缺席审判。

나는 김학철선생의 대쪽 같은 강직한 성품이 10년의 옥살이를 했건만 조금도 변함없는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문화대혁명과 좌경노선하의 억울한 사건, 가짜 사건, 잘못 처리된 원가착안 시정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1970년대 말에 아무련 죄가 없이 억울함을 당하고 오래 동안 인간이하의 푸대접을 받으면거 죽을 고생을 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도 은혜를 입기라도 하듯이 감지덕지해하고 눈물을 흘렸으나 김학철선생은 이런 분들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经历了10年的监狱生活,金学铁先生的品性依然刚直不阿,这不仅让我感到惊叹。纠正文化大革命和左倾路线造成的冤假错案,恢复名誉的20世纪70年代末,就算是清白的,也被冤枉,长期受到非人待遇,过着生不如死的生活的人恢复了名誉,而这些人当中很多人像是受到了恩惠一样感恩戴德,痛哭流涕。但是金学铁先生和他们截然不同。

조성일은 김학철의 뜻을 왕유에게 회보했고 왕유부주석은 중궁연변주위 선전부에 보고하였다. 나중에 김학철과의 타협이 이루어져 대회 참석자를 80명으로 정했다. 아직은 얼음이 채 풀리지 않은 해빙기와 같은 정치적 분위기인지라 김학철 도 일부 양보를 한 것이다.

赵成日把金学铁的意思转达给王维,王维副主席又向中共延边州州委宣传部做了报告。后来,和金学铁做了沟通和妥协。大会的参加人员定为80名。可能当时还尚处于政治的解冻期,金学铁也明白,做了一些让步。

1980년 12월 15일 무죄판결공포대회 날, 조성일은 연변문련을 대표해 김학철 선생을 승용차로 대회장에 모셨다.

1980年12月15日是无罪判决公布大会召开的日子,赵成日代表延边文联陪同金学铁先生乘坐汽车抵达大会现场。

무죄판결공포대회는 연변 주당교 회의실에서 열렸는데 사회를 사람은 당시 중공연변주위선전부 부부장이며 주문화국 국장 장일민이였다. 대회는 현수막도 었이 냉랭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었는데 우선 중급인민법원 형사심사1처의 책임자가 나와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급인민법원 형사판결서」를 읽었다.

无罪判决公布大会在延边州党校会议室里召开,主持这场会议的人是中共延边州委宣传部的副部长,州文化局局长张一民(音)。大会没有悬挂横幅,在冷清的氛围中进行,首先,由中级人民法院刑事审查1处的负责人宣读《延边朝鲜族自治州中级人民法院刑事判决书》

연변조선족자치주중급인민법원 형사판결서

(79) 연주판결형갑자 제 41호

延边朝鲜族自治州中级人民法院刑事判决书

79)延边州判决刑初字第41号

신소인(원심 피고) 김학철, 남 65세. 조선공민. 원 연변작가협회 전직 작가, 현재 연길시 신흥가 제8조 거주.

申诉人(原审被告)金学铁,男,65岁,朝鲜公民,原延边作家协会的专职作家。现居住于延吉市新兴街8组。

상기 신소인은 (72)연자법형자 제2호 현행반혁명죄로 유기도형 10년에 대한 판결에 불복하여 1979년 3월 20일 그가 쓴 『20세기의 신화』는 사상인식문제에 속한다는 이유로 분원에 신소를 제출하였다.

上述申诉人72)触犯了延边州犯罪者第2号现行反革命罪被处以10年的有期徒刑。对此申诉人表示不服从本判决,1979年3月20日,他撰写的《20世纪神话》一书,属于思想认识问题为由,向本院提出上诉。

원심은 인정하기를 신소인 김학철은 1964년 봄부터 1965년 5월까지 조선문으로 27만자에 달하는 반동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썼다. 상술한 사실에 근거하여 1975년 4월 3일 현행반혁명죄로 유기도형 10년에 언도되었다.

原审认为申诉人金学铁从1964年春天到1965年5月,用朝鲜语撰写了27万字的反动小说《20世纪神话》,基于上述事实,1975年4月3日,以现行反革命罪处以有期徒刑10年。

복사를 통해 신소인 김학철은 1975년 반우파투쟁 후 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문화대혁명운동 중에 그의 집을 수색하던 중 소설원고『20세기의 신화』가 사출되었다. 그런데 아직 발표하지 않았고 영향을 조성하지 못하였으므로 여전히 의식형태문제에 속하며 소설원고를 쓴 것만으로는 범죄가 구성되지 않으므로 현행반혁명죄로 판결한 원심은 부당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중화인민공화국형법』 제9조의 규정에 의하여 아래와 같이 판결한다.

通过复查,确认金学铁在1957年的反右派斗争后,写了这本《20世纪神话》小说。文化大革命运动中,从他们家中搜查出这本《20世纪的神话》,但是由于还没有出版,尚未造成影响,依然属于意识形态的问题,小说的原稿尚未构成犯罪,认为以现行反革命罪判决的原审不当。所以根据《中华人民共和国刑法》第9条规定,判决如下:

1. (72)연자법형자 제2호의 판결을 철수한다.

2. 김학철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1、(72)撤回延边州犯罪者第2条的判决。

2、宣布金学铁无罪。

1980년 12월 5일

연변조선족자치주중급인민법원 형사심판1처

심판장 최남빈

심판원 김종길

심판원 권광률

서기원 임위화

1980年12月5日

延边朝鲜族自治州中级人民法院刑事审判1处

                                    审判长 崔南斌

                                    审判员金中吉

                                    审判员权光率

                                    书记员林伟华

이어서 김학철의 소감발표가 있었는데 그는 아주 정중한 어조로 조용히 한글자한글자 읽어 내려갔다.

紧接着,金学铁发表了心得体会。他用非常郑重的语调,一个字一个字地往下念:

나는 일찍이 복간도 땅에 이렇게 땅굴이 있으리라군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 반동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으로 불리는 땅굴은 사람이 한번 들어가기만하면 강산이 두세 번씩 바뀌어서야 겨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我做梦都没想到,北间岛的土地上居然有这么深的洞穴。这个洞穴被冠以一个特别可怕的称呼,叫‘反动’,江山只有更替两三次,才能逃出来。

나는 오늘 현재 시간에 24년 동안이란 기나긴 고난의 길 걷기를 간신히 끝마치고 마침내 이 굴 어구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이 시각에 북경의 특별법정에서는 역사의 죄인들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사람 잡이를 업으로 삼는 인간백정들의 말로에는 오직 수치스러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到今天这个时刻为止,我结束了24年漫长而又艰难的道路,最终得以抵达洞口。此时恰逢北京特别法院正在审判历史的罪人,用以抓人整人为业的屠夫们的结果等待着的就是可耻的下场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스물 전에 나와 함께 땅굴속의 걷기를 시작한 길동무들 중의 적잖은 사람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不过,24年前与我一起在洞穴里摸爬滚打的朋友们看不到了,无论我怎么努力地眺望都看不到了。

정명석이가 없습니다. 서헌이가 없습니다. 주선우가 없습니다. 채택룡이가 없습니다. 김인준이도, 최문용이도 없습니다. 림종관이도, 심해수도 ,박상일이도 없습니다. 그리고 김동구도 없습니다.

郑明锡(音)没有了,徐轩一(音)没有了、周善宇(音)没有了、蔡泰龙(音)没有了、金任俊(音)、崔文龙(音)也没有了,林中官(音)、沈海寿(音)、朴尚一(音)也都没有了,金东裘(音)也没有了。

정명석이와 서헌이는 계급의 원수라는 몸서리치는 악명을 뒤집어쓰고 햇빛을 보는 음산한 굴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김인준이와 최문용이도 이미 천리이역에서 우리와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채택룡이는 처자식과 갈라져서 어언19년. 아직도 이국의 하늘아래서 외로운 나그네의 신세로 낮을 보내고 또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郑明锡和徐轩一背负着毛骨悚然的阶级敌人的恶名, 在暗无天日阴森的洞穴中悲惨死去, 金仁俊和崔文一也在千里他乡和我们幽冥永隔 ,蔡泰龙和妻儿分开19年,直到现在还在异国他乡的天空下漂泊,过着惨淡的生活。

이러한 수난자들의 가정은 까닭 없이 얼을 입어서 예외 없이 모두다 쑥밭으로 돼버렸습니다. 과부들의 긴 한숨, 고아들의 눈물과 울부짖음……도대체 이러한 인간 비극은 어떻게 빚어지고 또 무슨 까닭에 빚어졌습니까. 도대체 무슨 까닭에?

这样的受难者的家庭无缘无故地惨遭罹难,家破人亡。寡妇们长长的叹息,孤儿们的眼泪和呼喊。这样的人间悲剧究竟是怎样造成的,因为什么造成的,到底因为什么?

지나간 24년 동안에 이 땅위의 수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배우와 화가들이 그리고 음악가와 편집일군들이 서리를 맞았습니다. 우박을 맞았습니다. 벼락을 맞았습니다. 날벼락, 불벼락을 맞았습니다.

过去的24年中,这个土地上的许多作家和诗人,演员和画家,还有音乐家和编辑人员遭受了打击,冰雹的袭击,雷电的袭击,晴天霹雳,电光石火般的雷雨的袭击。

역사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합니다. 선량한 지성인들을-정직한 지성인들을 미친개 때려잡듯 마구 때려잡는 그런 치욕의 역사는 더더구나 되풀이되지를 말아야 합니다. 우리 문학예술인군들의 대오에 사정없는 도끼질을 해서 살벌한 수라장을 만들어놓고도 위대한 승리 만세 외치던 그런 전횡을 다시는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历史不要再重演了,对善良的知识分子—正直的知识分子像对待疯狗一样肆意鞭挞,置人于死地。这种耻辱的历史千万再也不要上演了。他们在我们文学艺术人员的队伍中使用毒辣的手段,建造杀气腾腾的修罗场,还高呼“胜利万岁”,再也不要纵容这种横行霸道的行径了。

그동안 나를 다시금 밝은 햇빛아래 나서게 하려고 애써주신 동지들의 정의감과 용기를 나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직한 인간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의감과 그에 따르는 비산한 용기가 없다면 우리 인류사회는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내딛기를 못할 것입니다.

那段日子里,我的朋友们为了帮助我出狱,重见天日而做出了不懈努力,他们的正义感和勇气我永远不会忘怀。如果没有从良心深处流露出来的人间正义和非常的勇气,我们人类社会不会有未来的,必将停滞不前。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승불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만세!

谢谢大家。战无不胜的马克思—列宁主义万岁!”

조성일은 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赵成日当时的感受是这样的。

처량하고 한산한 대회는 김학철선생에 대한 축하발언도 없이 30분도 안 되어 끝났다. 대회에 참가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김학철을 축하해주지 못할망정 만나는 것마저 주저하였고 용기 있게 축하의 악수를 나눈 사람은 거푸 몇 사람 되지 않았다. 한심한 일이였다.

“这场大会开得真是既凄凉又寒酸,对金学铁先生一句祝贺致辞都没有,仅仅开了30分钟就结束了”来参加场会的很多人不要说向金学铁表示祝贺了,连和他相见都格外犹豫。能够鼓起勇气,主动握手祝贺的寥寥几人而已,真是让人感到心寒。

20세기의 신화 김학철 선생 자신이 선언했다시피 강렬하고도 선명한 정치성을 소설로서 50년대 후반기의 좌경사조와 사회현실 중의 암흑면을 정명으로 대담하게 비판하고 또 사정없이 날카롭게 편달한 것으로 특징적인바 이것은 곧양식(훌륭한 식견과 판단력)있는 마르크스주의자의 바통한 부르짖음이며 오로지 우국충정에서 터져 나온 부르짖음이다. 또한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이 장편소설은 당시의 그릇된 정치질서와 수령에 대한 개인승배와 신격화라는 왜곡된 신화에 저항하며 역사의 진실을 파헤친 사실주의 작품이다.

20世纪的神话》正如金学铁自己所说的那样,是一部具有强烈鲜明的政治色彩的小说,正面批判了50年代末期的左倾思潮和社会现实中的阴暗面。主要特征是大胆的批判和无情尖刻的鞭挞。这是一位有见地的马克思主义者悲痛的呼喊,这种呼喊是忧国忧民之呐喊,笔者认为,这篇长篇小说抨击的是当时错误的政治秩序,抵抗对统治者的个人崇拜和神化,揭开真实历史的现实主义作品。

좌경노선이 살판을 치던 나날에 중국의 많은 작가들 어떤 작가는 폭압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자살했고 어떤 작가들은 4인방에게 다가서서 추파를 던지며 아침하기에 급급했으며 어떤 작가들은 문화혁명의 충격 속에서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자기의 목숨 살리려고 무진히 애를 썼다. 파금 같은 선생은 개혁개방이 퍽이나 진척이 된 후에야 비로소 신은 없다 선언했지만 김학철 선생은 적어도 파금 선생보다 20년도 더 앞서 신단에서 끌어내리려 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학철선생은 조선족문단에서 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문단에서도 가장 일찍이 올곧은 작가의 주체정신을 가지고 좌경노선에 항거해 나선 문학계의 투사이고 사상혁명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左倾思想笼罩的那段日子,很多中国作家无法忍受压迫,自杀死亡。有些作家亲近“四人帮”,急于暗送秋波,溜须拍马。有些作家在文化大革命的打击迫害下,忍受着屈辱,为了生存想尽办法。像巴金先生等一些人直到改革开放一段时期之后才提出“无神论”,金学铁先生提前20年就已经说过“要把神从神坛上拉下来”。从这个角度来看,不仅在朝鲜族文坛而且在中国文坛上金学铁是最早具有正派思想的文人。他是抵抗左倾路线的文学界的斗士,思想革命的先觉者。

라스트 헤비

最后的冲刺

김학철이 정치적 생명과 작가적 생명을 다시 찿았을 때는 어언 인생의 황혼 무렵인 65세, 남들은 손자, 손녀가 껴안고 천륜지락을 누릴 나이었다. 하지만 김학철은 인생을 다시 시작했고 라스트 혜비-말 그대로 전력으로 질주했다.  2001년 9월 작고하기까지 그는 단편소설 20여 편, 100여 편의 산문, 항일회상기 『항전별곡』(1983), 『김학철단편소설집』(1985), 장편소설『걱정시대』(상, 하, 1986), 산문집『무명소줄』(1989), 산문집 『누구와 더불어 지난날을 이야기하랴』(1994),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1995), 산문집 『우령이 속 같은 세상』(2001)등을 줄기차게 펴냈다.

当金学铁重新找回政治生命和作家生命的时候,不知不觉变成了步入黄昏之年的65岁的老人了。是应该抱着孙女享受天伦之乐的年纪,但是对于金学铁来说人生才重新开始,最后一搏—也就是奋力前进。2001年9月,去世之前为止,他发表了一系列作品,短片小说20余篇,散文100余篇,抗日回想传记《抗日别曲》(1983),《金学铁短篇小说集》(1985),长篇小说《激情时代》(上下卷,1986),散文集《无名小卒》(1989), 散文集《和谁一起诉说过去的日子》(1994),自传体小说《最后的分队长》(1995),散文集《像土螺壳里面的世界》(2001)等。

모든 입적은 그의 초인적인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었다.

所有的光辉业绩都是用超人的意志和不懈的努力完成的。

김학철의 『나의 하루』에 의하면 선생의 일과를 다음과 같다.

金学铁的《我的一天》中是这样描述他一天的生活的。

1991년 김학철의 나이 75세.

1991年金学铁75岁的时候。

이른 새벽 3시반, 머리맡의 자명종이 요란스럽게 울어대면 선생은 무조건적으로 후닥닥 일어나 어두운 가운데 부지런히 옷을 주어 입는다.

凌晨3点半,床头的闹钟响个不停,先生急急忙忙地起床,天还没亮,他就就穿衣服准备要出去了。

더듬더듬 아래층으로 내려와 뜰에 나서면 우선 어두운 밤하늘부터 본다. 별들이 보이면 더옥 좋고 안 보여도 무방하다. 비만 쏟아지지 않으면 된다. 전천후 출동이 못 되는 게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어찔 수 없는 노릇이다. 협장을 짚고서야 걸으니까 우산 받칠 손이 없기 때문이다.

摸索着下了楼,来到了院子里,先抬头望望天空。能看到繁星当然是再好不过了,看不见也无妨。只要不下雨就行。如果要下雨的话,因拄着拐杖走,没有办法打伞。

가로등 없는 거리로 나오며 강독으로 치닫는다. 인적 없이 괴괴한 유보도-발씨 익은 유보도를 꼿꼿이 달아서 다리목에 접어든다. 여기는 가로등이 켜져 있어 딴 세상 같다. 좀 쉬고 다시 강변 유보도로 꺾어든다. 여기서부터는 또 암흑세계-가로등이 없다. 이와 같이 박물관 앞까지 오는 데 모두 해서 25분가량 걸린다. 너른 공간이다. 김학철 혼자서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如果走到没有路灯的地方,就往河坝的方向前进。没有人影的阴森森的小道上,印着被踩过的脚印,渐渐地踏上了桥头,这个地方有路灯照耀,简直像另外一个世界,休息一会儿,又重新沿着河坝散步,从这个地方开始又进入另外一个世界了—没有路灯,到博物馆需要走20分钟左右的时间,是一个开阔的地方,

一个人的天地,真的是很神奇。

허리 운동 360번을 포함한 나름대로의 체조를 시작한다. 마지막 순서로 심호흡을 할 즈음이면 대개 어둠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한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너른 공간의 독점은 이렇게 깨진다.

腰部360度自由旋转,开始自行发挥做体操。当做到最后一步深呼吸的时候,黑暗中人们的身影开始三三两两的出现,一个人的空间就这样被破坏了。

돌아올 때도 다리 위의 가로등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동녘하늘은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한다. 잠꾸러기 게으름뱅이들은 영원히 보지 못하는 대자연의 아름답고 장엄한 경관이다……

回来的路上,桥上面的路灯依然没有熄灭。但东边的天空开始露出一抹浅红,那是贪睡的懒虫们永远看不到的大自然壮观又美丽的景象……

아침식사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역시 일즙일채. 반찬이 두세가지만 돼도 별써 이거 이렇게 복잡하지? 아이고 어지럼증이야!

早餐从来都是一汁一菜,小菜也只有两三种而已,他还会说“怎么弄得这么复杂,看着都眼晕!”

하기에 선생의 식탁은 언제나 단출하다. 게다가 술하고 담배하고는 아예 원수치부를 하니까 경건한 청교도나 다를 바 없다.

所以先生的食谱看起来总是很简单,而且,先生既不抽烟又不喝酒,俨然一个清教徒。

식후에 녹차 미시고 나면 서둘러 책상에 다가얹아 하루 일을 시작한다. 불펜만을 일편단심 애용하는데 일전에 만난 외국작가들도 거의 다 저도 불펜 전문입니다.

饭后一杯绿茶,喝完以后,马上坐到座位上,他特别喜欢使用圆珠笔写字,以前见过面的外国作家也说我也是圆珠笔派

저도 불펜파라나까요. 이와 같이 당당히 성명들을 하는 바람에 동류가 세계에 널려있는 같아 기분이 매우 좋다.

这样宣称“我是圆珠笔派”,仿佛世界上都有自己的同类一样,心情好极了。

썼다가는 고치고 썼다가는 고치기를 되풀이 하다나면 원고지가 마치 그릇을 엎지르기라도 같이 어수선해진다. 그런면 빨간색 불펜으로 각중 부호를 그려놓고 또 이리저리 금을 그어 연계를 시켜놓는다.

写一写就修改,写一写就修改,这样一来,整个文稿就像是墨盘子被扣了一样,杂乱无章。他就用红笔画各种符号,各种画线进行连接。

느닷없이 초인종이 올린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소리가 바로 저 소리다. 세 식구헤사 손자는 학교 가고 부인은 제 볼 장 보러 가고 낮에는 대개 혼자 집지기 노릇을 해야 하는데 저 소리가 딱 질색인 것이다. 하지만 뒤숭숭한 원고를 그대로 뇌두고 얼어선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에라 모르겠다-못 들은 체 하고 가만히 있자. 또 올린다. 그래도 못 들을 체. 또 올린다.

突然门铃响了,那是他最讨厌的声音,3口人中,孙子去上学,妻子去市场买菜,只有他一个人看家,所以最讨厌那个声音了。但是把零乱的文稿就那么放在桌子上感觉十分不妥当,干脆,装作没听见吧,门铃又响了,还是没听见,又响了。

넨장! 뇌까리며 마지못해 일어나 절똑거리며 나가 문을 열어준다.

“该死的”他嘟囔着,不得不起身一瘸一拐地去给开门。

계란하고 옷가지 바꾸세요.

“换鸡蛋和旧衣服吧。”

밉상으로 생긴 남방 여자가 뻔뻔스레 한다는 수작이 고작 요것이다.

这个长相丑陋的南方女子做的厚脸皮的事情也就是这件事了。

귀싸대기를 우려주고 싶은 것을 참고 문미(문틀보)를 가리켜 보인다. 무언의 경고인 것이다. 거기에는 한인막고문이라는 패찰이 뚜렷이 나붙었다. 남방 여인은 쑥스러운 빛으로 물러간다.

强忍住想扇他一巴掌的想法,手指门眉,这是无言的警告。在那儿贴着“闲人莫敲门”的牌子。这个南方女人露出难为情地神色,很快退下去了。

문을 닫고 들어와 다시 뒤숭숭한 원고와 씨름을 한다. 이번에는 전화벨이 울린다.

“咣”地一声关上门,再和乱糟糟的文稿作战。可这次电话铃又响了。

! 혀를 차고 일어나 소화기를 집어 든다. 그러나 고작 들린다는 소리가

“啧”他砸砸嘴,一把抓起电话。但却是这样的声音

두만강무역공사입니까?

“请问是图们江贸易公司吗?

아닙니다! 화증이 수화기를 덜컥 내려놓고 다시 원고를 들여다본다. 보다 만 글줄을 다시 찾아내기도 전에 또 벨이 올린다.

“不是!”怒火中烧,狠狠地挂了电话,重新审视文稿。还没看几行字,电话铃又响了。

(이거 염병에 까마귀 소리 아냐?)

(这声音怎么这么难听呢?)

울화통이 터지며 정수리로 같기도 하고 연기 같기도 뜨러운 기체가 터지며 뿜겨 나오는 환히 알린다.

顿时火冒三丈,头顶上似气又似烟的气体,一时喷发出来。

거기가 두만강 무역공사가 아니라고요?

“真的不是图们江贸易公司吗?”

아니라고 했는데 무얼 물어보시우?

“我都已经说不是了,怎么还问呢?”

그럼 거기가 어딥니까?

“那你是哪里啊?”

땅파기도 이만전만이 아니다. 이런 벽창호는 한 번 본때를 보여주어야 정신을 차린다. 그래서 김학철은 슬쩍 시치미를 따고 감미롭고 부드러운 어조로

简直就是对牛弹琴,对于这样的老顽固,必须给他点颜色看看,才会清醒。金学铁装模作样地用甜美又温柔的语调说道:

여긴 감옥입니다. 정원이 아직 차지 않았는데- 오시겠습니까?

“这里是监狱,目前还没有满员,你要来吗?”

그제야 벽창호도 깨달은 모양으로 전화를 제꺽 끊어버린다.

这个时候,这个老顽固才明白过来,很快挂了电话。

다시 일에 달라붙는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기라도 하듯이 정신을 집중하고 한자 한자 엮으며 고치며 한다.

    重新又回到工作中。宛如解开凌乱的线团似的,又可以精力集中地一个字又一个字地修改了。

한낮 .

白天的时候。

부인이 바쁜 결음으로 돌아오고 반시간쯤 지나면 손자가 덜레덜레 점심을 먹으러 온다. 일요일만 빼놓고 거의 날마다 되풀이되는 가정행사다.

妻子脚步飞快地回来了,又过了半个小时左右,孙子屁颠屁颠地过来吃午饭,除了周日,这个家庭几乎每一天都是一样的。

김학철은 손자가 하도 귀여워 여석의 뺨에다 뽀뽀를 해주고 코와 턱을 각각 두어 범씩 맞비빈다. 이 한 벌의 절차가 다 끝이 나야 점심을 먹는다. 점심은 우유 한 컵, 빵 하나, 사과 한 알이면 족하다.

金学铁特别钟爱孙子,亲亲他的脸颊,再揉揉两三下他的鼻子和下巴,这一套的程序都结束了,才开始吃午饭,午饭是一杯牛奶,一个面包,一个苹果就够了。

간소한 점심 식사가 끝나면 잠시 휴식을 한다. 이 시간을 이용해 우편물들을 정리하는데 먼저 편지부터 뜯어본다. 피봉은 반드시 가위로 자른다. 그냥 손으로 찢는 법은 없다. 절구가 가뜬해야 건사하기 좋다는 이점도 있거니와 그보다도 발신인을 존종한다는 의미가 큰 것이다.

简简单单地吃一口就开始休息,他利用这个时间段整理邮件,首先从拆信开始,启信封一定要用剪子,不能随意用手拆开,只有切口弄得轻松,保管起来才会方便些,另一方面,也是对发信人的尊重。

서안에서 전우 서휘가 편지를 보내왔다.

西安曾经的战友徐辉发来的一封信。

학철동무 :

致学铁同志:

보내주신 편지와 사진, 홍삼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你给我发来的照片,信还有红参,我都收到了,真的是太感谢了。

날씨는 지금 40도를 오르내리면서 숨 막히게 하는데 진짜 인삼 덕택으로 무난히 견디어내고 있습니다. 청도나 기타 해안지대를 제기했으나 여전히 불허하여 어제 이 곳 임동 해방군요양원에 왔습니다. 9월에 돌아가렵니다. 편지는 여전히 서안 간부휴양소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现在这个地方的温度升到了40度,真的是快让人窒息了,多亏了红参,坚持到现在。提出要到青岛及其它沿海地区但是没批准所以昨天我来到了临潼解放军疗养院,打算9月份回去,要是给我写信的话,还是希望发到西安干部疗养所。

오늘 우리 겨레운명을 바로잡을 있는 현실가능성을 손에 잡은 상조, 학철 두 동무의 역사적 사명은 두 동무가 이미 지닌 천당지옥의 경력과 불굴의 지혜로 하여 반드시 온 세계를 진동하면서 성취하리라고 맏으면서 두 동무의 전투를 축복합니다.

尚祖(音)、学铁两位同志身上具有摆正民族命运的现实可能性,他们的历史使命感是基于他们所经历的天堂地狱的磨练和不屈的智慧,你们必将取得轰动整个世界的成就祝你们奋勇前进。

                                            서휘

                                         1991.7.28

                                                徐辉

1991年7月28日

김학철은 편지를 읽고 창문 너머 하늘을 응시한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개인독재와 싸우다가 실패하고 이국 타향에서 홀로 지내는 옛 전우 서휘, 이제는 역사의 진실을 밝힐 일을 이상조와 이 김학철에게 부탁하고 있지 않는가.

金学铁读完这封信后,眺望着窗外的天空,战友徐辉曾经冒着生命危险与个人独裁做斗争,后来失败了,在异国他乡独自生活,现在他不正是在拜托李尚祖和金学铁去揭开历史的真相吗?

가끔 독자의 편지를 읽기도 하는데 사진을 보내달라거나 면회를 신청하는 것도 있다, 사진은 일체 보내지 않는 것이 관레이므로 불가능하고 또 면회는 먼 앞날을 기약해야 하는 수밖에 다른 도라가 있다.

偶尔也有读者的来信,有的要金学铁的照片,有的请求和金学铁见面。不发照片是惯例,相约见面的事情就不得不说是未来的事情了。

오후 2시 경부터 일을 다시 계속한다. 그는 스스로 타고난 천분이 없으니까 노력으로 때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눈까풀이 내리덮이기 시작한다. 눈뜬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신다. 사정없이 내리덮이는 눈까풀, 걷어 올리려는 안 간힘. 어떡하다 손에 쥔 불펜을 떨어뜨리고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얼른 불펜을 다시 잡는다. 하지만 소용없다. 이와 같은 저항 서너 반복하다가 마침내 불가향력적임을 깨닫고 장탄식을 한다. 그리고 조물주를 원망한다.

下午2点左右又开始工作,他自己说自己没有天分,只能靠后天努力学习。可是没过多久,双眼皮就垂下来了。使劲睁着眼睛,可眼皮还是无情地垂下来,使劲儿撩上去,不知道该怎么办了,手中的圆珠笔突然掉下来,吓了一跳。马上重新抓起了笔,但是也没有什么作用。像这样的“抵抗”反复进行了三四次,最后意识到这是不可抗拒的力量,长叹了口气。

-단 백년도 못 사는 인류를 창조하면서 그나마 3문의 1은 누위서 자게끔 만드시다니……하느님도 참 야속하십니다.

-上帝创造了连百年的寿命都不到的人类,寿命的1/3的时间都让人们睡觉,也真是无情啊”他开始责怪起上帝来。

침대에 누우신다. 꿈에서는 모택둥과 일대일로 대화한다. 옛 교장 장개석도, 태항산에서 만난 팽덕회도 찿아온다. 그들과의 대화를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취미다.

躺在床上,连做梦都在和毛泽东对话。以前的蒋介石校长、在太行山认识的彭德怀也都来了。和他们在梦中的对话讲给儿子听也是一种乐趣。

자고 일어나 마시고 나면 한결 정신이 난다. 또 일을 시작한다. 스스로 일벌레라는 생각이 든다. 석양 길에 접어들어 앞날이 멀지 않음을 의식하니 더욱 기를 쓰게 되는 것이다. 이웃 간 친지간의 상종도 될수록 기피하고 일에만 물두하니 지청구도 심심찮게 듣는다. 하지만 어쩌랴!

睡了一觉起来,喝杯茶,就更加有精神头了。又开始工作了,他觉得自己就是个工作狂。夕阳时分,总会有种未来不再遥远的感觉,更加拼命工作。尽量避免和亲戚朋友聚会,全心投入到工作中。所以时而能听到大家对他的责备之声。

저녁 전에는 일감을 한옆에 밀어놓고 산적한 신문들을 소탕해치우려고 뼈문다. 중요한 기사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눈이 화등잔이 된다. 부지런히 메모를 하고 조심스레 오려내고……신문을 거저 읽기만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 시간이 그에게는 가장 즐겁다. 최상의 행락인 것이다.

他下决心在晚上之前把堆积如山的报纸全都看完。重要的新闻一定一条都不漏掉,睁大眼睛浏览,用工做笔记,并把它裁剪下来……不只是在阅读报纸,对他来说那段时间是最快乐的,是最幸福的享受。

신문과 라디오가 없는 세상이란 상상할 수가 없다. 텔레비전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시들방귀다.

没有报纸和广播的世界真是不敢想象。电视有没有都成,无关紧要。

석후.

夕阳西下

편지를 받아놓고 답신을 못한 것들이 적잖은데 두어 군데다 우선 답장을 쓴다. 전에는 당일로 꼭꼭 답신을 보냈었는데 이제 그게 잘되지 않는다. 나이 탓이리라.

收到信却有不少的信件没有予以回复,其中的两三个首先要回信。要是从前当天就能给写完,但是现在可不行了,可能是年纪大了。

어째 엽서라는 없는지 모르겠다. 엽서에다 몇 줄 간단히 적으면 될 것을 꼭 서한지에다 써서 봉투에 넣고 봉을 한 뒤에 다시 우표를 붙여야 하니 얼마니 번거로운가. 1991년 현재 세계에서 엽서가 없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을 것이다. 해방초기까지 엽서가 있었는데 정말 모를 노릇이다. 지금도 그림엽서 따위는 있지만 그건 실용성이 별로 없는 거니까 있으나마나이다.

不知道当时为什么没有明信片,在明信片上写几行就行了,偏偏要写到书信纸上,放在信封里,贴上邮票,多麻烦啊。1991年世界上没有明信片的国家可能就只有中国了吧。解放初期还有呢,后来就不知道怎么没有了,如今也有图画明信片,但是缺乏实用价值,也就可有可无了。

다시 일에 달라붙는다. 머릿속이 마치 시들부들 말라버린 해면 같은 게 암만 짜도 뭐가 나와 주지를 않는다. 사고력이 고갈을 한 모양이다.

又开始投入工作,但头脑像逐渐干涸没有生气的海绵,无论怎么挤,就是不出水,一点思路都没有。思考能力大概是枯竭了。

길림시의 소설가 고신일의 얼굴이 떠오른다. 언제인가 선생님, 하루에 한 5천 자씩은 모난히 쓰시지요?하고 부러운 얼굴을 했다. 그때 김학철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원고개를 저었었다. 그 십분의 일, 500자를 겨우 쓰기 때문이다.

突然想起吉林市的小说家高信一(音)说的话。有一天他很羡慕地问“先生,您一天写5000 字很轻松吧?”,金学铁哭笑不得,急忙摇了摇头,因为他一天才写500字,也就是高信一说的十分之一而已。

하긴 평균수치가 500자라도 날마다 쉬지 않고 쓰면 한 달에 1만 5천 자, 1년이면 18만 자가 되는 셈이니 우습게 여길 일도 아니다.

其实,就算是一天写500字,马不停蹄地写,一个月15000字,一年18万个字,也不能小看的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부족한 능력을 근면성으로 별충하는 타입- 거북을 타는 타입이라고 한다.

他自言自语道:“能力不够,勤奋来凑—乌龟式模式”

그러나 뇌즙을 암만 짜도 방울도 나올 때는 깨끗이 단념하고 책장을 덮어버린다.

但无论怎样绞尽脑汁,一个字也写不出来的时候,索性停止写作。

여자가 즐길 때는 습관적으로 『당시 삼백 수』를 재음미한다. 이백, 두보, 백낙천에 심취해 그 세계에 아주 푹 잠겨버린다.

空闲时候,他习惯性地吟诵《唐诗三百首》,他特别喜欢李白、杜甫、白乐天这些诗人,深深地陷入到唐诗的世界。

밤저녁

晚间时分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대니

铃响了,将话筒放在耳边。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 조정래입니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태백산맥』의 작가가 서울 자택에서 걸어온 전화다.

“先生您好,我是赵正来(音)”这个声音听起来真是让人无比愉快,他是《太白山脉》的作者,从首尔的家中打来的电话。

김학철선생이 첫마디에 에이, 담배냄새가 예까지 풍겨오네.

金学铁先生的第一句话是,“哎,烟味都飘到这儿来了呢。

하고 넘겨짚으니 허를 찔린 조정래는 파안대소를 하느라고 한참 동안 말을 못한다.

一听到这话,赵正来哈哈大笑,笑得一时说不出话来。

사진 받으셨지요?

“收到照片了吧?”

이윽고 조씨가 말을 잇는다.

接着赵先生问

받았어, 받았어.

“收到了,收到了。”

밉게 생겼죠?

“是不是长得很丑?”

그게 무슨 소리여. 대학생 형님이 생겼다구 손자 녀석이 좋아서 뮈 야단인데.

“这是什么话啊,有了大学生哥哥,孙子高兴的不得了呢

김학철과 조정래는 모두 보성고보 출신인데 김학철의 손자의 조정래의 아들이 우의의 표시로 사진들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저쪽도 외아들인 까닭에 동생이 생겼다고 여간만 좋아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金学铁和赵正来都是宝成高中出身,金学铁的孙子和赵正来的儿子通过互送照片的方式表示友好。由于那头赵正来的儿子是个独生子,以为多了个弟弟,非常高兴。

피치간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자는 인사하고 전화를 끊으니 벽시계가 10시를 친다.

两人彼此谈论对作品的看法,互相问候,最后挂电话的时候,墙上挂钟敲响,已经10点了。

천하없어도 3시 반에는 또 일어나야 하니까 무조건 잠자리에 들어야 할밖에.

无论如何清晨3点半一定要起来,所以现在必须要去睡了。

25.격정시대

25.『激情时代』

김학철 문학의 기본 주제

金学铁文学的基本主题

김학철의 작품세계는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쟁을 비롯한 우리민족의 항일투쟁에 대한 형상화로일관 되어 있다.  해방공간의 서울에서 발표한 지네,  담배국 같은 단편소설들과  1950년대 초반 북간도를 중심으로 벌어진 우리민족의 항일무장투쟁을 서사시적화폭으로 담아낸 장편  3 부작 해란강아말하라.  그리고  1980년대 다시 조선의용군의 태항산 항일투쟁을 전기문학으로 재현한 항전별곡등은 그가 우리민족의 항일무장투쟁을 문학적으로 복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준다.

金学铁的作品世界形象描写了朝鲜义勇军的抗日斗争等一系列朝鲜民族的抗日斗争史。解放战争时期,在首尔发表了《蜈蚣》《烟叶汤》等短篇小说,20世纪50年代初期,金学铁又以史诗般的画面,写出反映朝鲜民族抗日斗争的长篇3部作小说《话说海兰江》20世纪80年代,又以传记文学题材创作了《抗战别曲》,形象再现了我们民族的抗日斗争,金学铁为了以文学的形式还原抗日斗争,付出了不懈的努力。

특히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쟁은 북한과 남한에서 모두 외면되어 왔다. 북한 정권은 김일성 항일신화 외에는 그 어떤 항일부대도 용납할 수 없었고 남한 정권은 좌익 공산주의 계열로써 조선의용군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학철은 북한에서 조선의용군 전우들이 무참히 숙청당함을 보아왔고 43년 만에 서운을 찾았어도 조선의용군 기념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特别是朝鲜义勇军的抗日斗争,在朝鲜和韩国都遭到了冷遇,在朝鲜,除了金日成的抗日神话之外,容纳不下任何一支抗日部队,韩国的掌权者是左翼共产主义之流,不承认朝鲜义勇军。金学铁亲眼目睹了朝鲜义勇军战友们惨遭肃清。43年后回到首尔的时候,也没有见到朝鲜义勇军的纪念碑。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취후의 분대장으로서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망각의 흐름모래 속에 붇혀버리지 않게 하려고 고신분투를 해야 했다. 김학철은 총을 잡고 태항산의 험준한 벼랑길을 톱아 오르고 또 미끄러져 내릴 때, 나중에 그 자신만이 살아남아 전우들의 피 흘린 역사를 기록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金学铁作为朝鲜义勇军的“最后的分队长”,为了不让他们所走过的足迹被历史的流沙所掩埋遗忘,又要孤军奋战了。金学铁抓起枪杆子爬上太行山险峻的悬崖的时候绝不会想到只有他自己活了下来,会把战友们流血牺牲的这段历史记录下来。

태항산 우거진 속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는 전우들에 대한 김학철의 잊을 없는 동지애가 끝내 『격정시대』(상, 하)로 1986년 9월 출간됐다.

为了纪念在太行山繁盛茂密的丛草下面长眠的战友,追忆难以忘怀的战友情,终于1986年9月出版了《激情时代》(上、下)。

조선의용군항일투쟁의 피어린 기념비

朝鲜义勇军抗日斗争的血染的纪念碑

『격정시대』는 김학철의 청소년시전의 경력과 그의 사상의식 발전과정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서 주인공 서선장의 형상에는 작가의 자서전적 요소가 다분히 깃들어 있으며 정신발전의 부동한 단계 반영되어 있다.

《激情时代》是一部运用文学形式形象地描写金学铁青少年时期的经历和思想发展过程的作品。在刻画主人公徐船长的过程中,充分融入了自传体的因素反映出“精神发展的不同阶段”。

『격정시대』를 펼치면 1928년 초봄의 어느 날 원산 앞 바닷가에 그림을 그리려 나온 보통학교 4학년생 서선장과 만나게 된다. 고양이 수염을 깎기도 하고 벌집을 쑤시기도 하는 무사분주하고 장난기 심한 선장, 그러나 총명이 뛰어나 작문만은 잘 짓는다. 그 당시 날로 혹심해지는 일제의 식만통치와 그에 대한 조선인만의 반일운동의 물결은 나이 어린 선장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에 눈 뜨게 한다.

翻开这本《激情时代》一书,就会遇到1928年初春在元山海滨写生的小学4年级学生徐船长,徐船长是个“不安分的淘气鬼”,给小猫剃胡子,捅马蜂窝。可他很聪明,写得一手好文,当时,日益残暴的日本帝国主义殖民统治和朝鲜人民的反日斗争浪潮,唤醒了船长幼小的心灵里的民族意识。

선장이 서울에 사는 변호사의 부인- 숙자 아주머니네 집에 양아들로 들어가 공부하게 된 석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선장은 서울에서 친일파인 강교장을 밀어내는 반일학생운동애 참가하게 되며 또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듣고 흥분하기도 한다. 특히 원산의 부두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단행했을 때 일본 선원들까지 뱃고동을 울려 성원하던 일에서와 체포령이 내린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재유를 자기의 저택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된 일본인 교수 스기우라의 사건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船长被首尔的律师夫人—淑子大婶收养,读书学习可以说真是人生的一件幸事。船长参与了推翻亲日派姜校长的反日学生运动,与此同时,爆发了光州学生运动,听到这一消息,船长格外兴奋。特别是参加那场元山码头总罢工运动时,日本船员为他们打响汽笛,欢呼加油的事情,还有日本教授三宅(音)将独立运动家李载俞(音)藏在自己家,尔后被发觉的事情,对船长来说,都是不小的震撼。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대룍침략 야욕이 노골화되고 간도의 만보산사건, 9.18사건 터지며 마을의 애국청년 김영하 등이 체포, 투옥된다. 괴로움에 부대끼던 선장은 중국 광주의 황포군관학교에서 조선 젊은이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이며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조선 젊은이 윤봉길이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사령시라가와 대장을 포함한 일본군 장령 10여 명을 살상했다는 소식에 접한다. 피끓는 선장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오른다. 남들은 목숨을 걸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나만 안일하게 여기서 공부를 ? 수치스러운 일이다.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시서는 폭탄도, 권총도 다 손에 넣을 수 없으니까……중국으로 건너가자. 임시정부를 찾아가자. 황포군관학교를 찾아가자. 가면 무슨 수가 나겠지, 가자! 이처럼 소설은 선장이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게 과정을 실감 있게 보여주면서 작품의 배경을 1930년대 중반의 상해로 옮기고 있다.

到了20世纪30年代,日本要征服大陆的野心赤裸裸地暴露出来,间岛的“万宝山事件”、“九一八事变”随之爆发,村子里的爱国青年金永霞(音译)等被捕,进监狱。而且听到朝鲜青年在中国广州的黄埔军校学习,朝鲜的年轻人尹奉吉在上海虹口公园扔炸弹,成功杀伤日本的派遣军将领白川义则大将等10余名日军将领等消息,船长感觉热血沸腾。“别人都在为国家的独立誓死搏斗,我在这儿学习又有什么用呢,真是太惭愧了,良心受到谴责,但是在这儿弄不到炮弹、手枪……还是去中国吧,去找临时政府、去找黄埔军官学校吧,只要去的话一定会有办法的,去吧!”这部小说生动地介绍了船长走上独立运动之路的过程,将作品的背景转移到20世纪30年代中期的上海。

상해에 이른 선장은 이춘근 ,김혜숙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며 그들의 소개로 남경에 본부를 둔 조선민족혁명당 상해지하조직에 들어가 테러활동에 종사한다. 그는 처음으로 시가 1천만 원어치의 헤로인이 밀수입되는 것을 눈감아주고 뇌물을 받아서 벼락부자가 된 상해 세관의 조선인 관리 신영호를 혼내주는 사로니까 행동 참가한다. 그는 당황해 하고 빈 구석이 많았으나 용감하고 지혜로운 조직성원들과 사귀는 가운데서 어느덧 표범의 넋을 가진 사슴으로, 용감한 테러분자로 자라난다. 또 조직 안에서 중국공산당 지하당원 성재수를 만나며 그의 영향 하에 『변증법적 유물론』, 『프랑스 내전』등 마르크주의서적을 탐독함으로써 점차 마르크스주의에 마음이 열린다. 개인테러는 극소수의 고상하고 가장 용감한 애국자들만이 해낼 수 있는 신성한 사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단순한 민족주의자 선장은 점차 민중을 발동하는 것을 중요한 투쟁수단으로 삼는 공산주의 계럴에 눈을 돌린다.

来到上海,他遇到了独立运动领袖李春根(音)、金惠淑(音)等人,经他们介绍加入总部在南京的朝鲜民族革命党上海地下组织,从事暗杀活动。他参加的第一次暗杀活动是恐吓上海海关朝鲜人官吏申英浩(音),申英浩走私1千万元价值的海洛因,并从中受贿成为暴发户,一开始船长很慌张,有很多不足的地方,但在英勇机智的组织成员的熏陶下,不知不觉成为勇敢的暗杀者。后来在组织内部遇到了中国共产党地下党员成在秀(音),在他的影响下,逐渐研究《辩证唯物论》、《法国内战》等马克思主义书籍,并在思想上接受了马克思主义。之前认为暗杀活动是极少数高尚的、最勇敢的爱国者才能够做到的极其神圣的使命的船长,从单纯的民族主义者逐渐把视角转移到发动群众作为斗争手段的共产主义运动之中。

남경의 중국육군군관학교에서의 생활은 선장의 성격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는 여기서 김두봉, 한빈 등 조선의 이름난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되며 진일보 마르크스주의서적을 탐독하게 된다. 1936년 학교를 졸업한 선장은 국민당 소위로 임명되어 8.13 상해보위전투에도 참가하지만 국민당의 무저항주의정책과 염통 곪는 줄은 모르고 식이 장식으로 벼슬 오를 궁리, 천 냥 모을 궁리만 하는 국민당국대의 썩은 늪같이 침체된 생활에 염오를 느낀다.

南京的中国陆军军官学校的生活对船长的性格发展产生极大的影响。在这里,他开始接触金杜峰(音)、韩斌(音)等朝鲜赫赫有名的共产主义者,进一步探索马克思主义书籍。1936年,毕业后的船长被任命为国民党军队少尉,参加了“8.13”上海保卫战,但是很快,对国民党的不抵抗政策,心术不正,只图谋升官发财的生活状态感到厌恶。

무한람락전야, 중국공산당과 주은래의 창의 밑에 1938년 10월 10일 국민당정부으 비준을 받고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관할구역에서 창립을 선포한다. 조선의용대는 맨 먼저 동방의 마드리드로 일컫는 무한 보위전에 뛰어든다. 선장은 전우들과 함께 항전표어를 쓰기도 하고 극을 공연하기도 한다. 이러한 항일투쟁의 물결 속에서 선정은 마침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선장은 일본어에 능숙한 까닭에 국민당국대 군단사령부의 통역- 수양아들 노릇을 하게 된다. 국민당의 소극항전, 적극방공의 정책과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은 선장의 가슴에 분노의 씨앗을 묻어둔다. 그는 목숨을 걸고 정의로운 전쟁에 뛰어들어서까지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신세가 한스러워진다. 이는 또한 국민당관할구역에서 활동한 전체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공통한 심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 무렵 조선의용대 대원들 속에서는 해방구로 넘어가 팔로군과 합류하는 게 유일한 출로라는 사상조류가 대두한다. 이런 정세 하에서 팔로군 총부는 조선의용대를 낙양을 거쳐 황하를 건너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들어오도록 조직한 것이다.

武汉陷落前夕,在中国共产党和周恩来指挥下,1938年10月10日应国民党政府批准,宣布在国民党管辖区创立朝鲜义勇军,朝鲜义勇军刚开始投入的是被誉为东方马德里的武汉保卫战,船长和战友们一起使用抗战标语,表演话剧,在这样的抗日浪潮推动下,船长最后加入了中国共产党,由于船长精通日语,为国民党军队的军团司令部做翻译-扮演“养子”的角色。但是国民党的消极抗战,积极反共政策和他们花天酒地的生活,令船长的心中埋下愤怒的火种。他舍命投入战争还要看别人的脸色行事,这样的处境让他感到心寒。这也是在国统区管辖下活动的全体朝鲜义勇军将士们共同的心情。所以,在那个时候,朝鲜义勇军队中出现新的思想潮流,即到解放区和八路军汇合才是唯一出路的想法。在这种局势下,八路军总部组织指挥朝鲜义勇军经过洛阳,渡过黄河,赶赴太行山抗日根据地。

『격정시대』는 1941년 12월 태항산전투까지 기록하고 있으며 태항산에서의 이와 같은 전투의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라는 구절로 끝났다. 주인공 서선장- 김학철이 조선의용군에 있어서의 체험의 끝이 1941년 말의 호가장전투까지였기 때문이다.

《激情时代》记叙的内容一直截止到1941年12月太行山战役结束,这本书用“太行山上这样的战斗真不知道什么时候能结束”一句作结。因为主人公徐船长—金学铁的朝鲜义勇军的经历就截止到1941年年末的胡家庄战役。

『격정시대』를 두고 김학철 자신도 모종 원인으로 조성된 역사의 공백을 메울수 있는 문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자신한 있고 김윤식은 조선의용군의 제반 연구기록들과 대조하면서 조선의용군의 초창기 모습을 생생이 증언한 것이 김학철 기록이 최대강점이다.라고 하면서 특히 조선의용군의 일단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이유로 중국공산당의 집결지 태항산까지 넘어가게 되었는가를 증언하는 기록은 김학철의 것이 유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유일하다함은 체험적이라는 뜻이다.라고 평가한 있다.

金学铁本人也十分肯定地认为,《激情时代》,本身从某种程度上具有填补历史空白的文献价值。金允植(音)将这本书与朝鲜义勇军的相关研究记录进行了对照,表示金学铁记录的最大的优点是生动再现了朝鲜义勇军“初创期”的面貌。他评价说“只有金学铁记录了朝鲜义勇军队具体在什么时候、什么原因前往中国共产党的集结地点太行山,这种唯一性就是亲身经历的结果”。

《격정시대》의 예술성에 관해서 김명인은 작품의 열린 서사형식은 혁명적 낙관주의의 주조를 아주 됫받침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김학철의 소설들은 다성적이고 개방적인 서사구조를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다. 그것은 우리 전통의 민담과 같은 서사구조에 가깝다. 작자는 마치 옛날의 이야기꾼처럼 자신의 삶 속에서 보고 듣고 직접 겪은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을 한 보따리 사안고서 큰 줄거리가 흘러가는 중간 중간에 틈나는 대로 하나씩 꺼내놓는다. 그 이야깃거리, 즉 에프소드들은 나름대로 또 발전 하면서 소설 전체를 넉넉하게 열어놓는데 기여한다. 또 이러한 이야기에 걸맞은 해학과 골계의 민중적 정서가 이 소설의 도처에서 지천으로 배어나오고 있으며, 그 정서를 가능하게 하는 민족적 풍속과 생활에 관한 묘사가 전편을 관류하고 있다.

对于《激情时代》的艺术性,金明仁(音)强调这部作品采用的叙述形式奠定了革命乐观主义的主调。他这样说道“虽然前面也提到过,金学铁的小说具有多重性和开放性的叙事结构”,类似于我们传统的民间故事,作家像一位说书人一样,将自己所见、所闻、所经历的许多故事整理到一起,在剧情发展的过程中穿插着这些内容,这些故事,也就是小插曲的故事情节各自延伸开来,丰富了整部小说的内容。符合大众趣味的诙谐和滑稽在这部小说中随处可见。对民族生活和风俗的描写贯穿全篇,让这种趣味体现的淋漓尽致。

从狭隘的民族主义中摆脱出来,走向民众的国际整合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민중적 국제 연대

  2006년 11월 4일 김학철 탄신 90주년을 기념하여 연길에서 『김학철 김사량 항일 문화과 조선의용군연구』 구제학술대회가 열렸는데 한국 고명철교수는 「혁명성장 소설의 공간. 민중적 국제연대 그리고 반식민주의」라는 눈문을 발표하여 김학철 항일문학이 가지는 현대성을 새롭게 해석해 이목을 끌었다. 그는 격정시대를 혁명성장소설로 보면서 주인공인 선장이 혁명가로서 거듭나는 주요 공간과 맺는 관계를 살펴본 다음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

2006年11月4日,为纪念金学铁诞辰90周年,在延吉举办了《金学铁金史良抗日文学和朝鲜义勇军研究》国际学术会议,韩国高明哲(音)教授发表了《革命成长小说的空间,民众的国际联系以及反殖民主义》的论文,重新解读了金学铁抗日文学的现代性,引起很大反响。他把《激情时代》看作是一部革命成长小说,分析了主人公船长成长为革命家的主要空间的联系后,他总结如下:

선장에게는 유년시절부터 배타적이고 페쇄적인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민중적 연대를 통한 국제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발견된다. 선장에게서 발견되는 국제주의자로서의 면모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그의 항일독립운동을 협서한 차원에서 벌이는 민족해방운동이 아나라 식민지 근대의 야만과 폭압으로부터 피해 받는 약소 민종의 진정한 해방을 성취해내고자 하는 차원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선장에게서 독자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선장이 혁명가로서 성장하는 가운데 보이는 민중격 연대감 그 진정성이다. 비록 원산의 유년시절에는 원산부두노조파업에 대한 일본 선원들의 지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 당혹스러워 하지만. 경성에서 청요릿집 중국 사환이 보이는 두 행동 양태에 대해서는 그 연유를 이해하게 된다. 사정은 이렇다. 청요릿집 중국 사환은 조선인 나무 장사와 가격 흥정을 심하게 한다. 그 장면을 지켜본 선장은 중국 사환에게 민족적 차별의 감정을 품는다. 그런데 이내 그 민족적 차별 감정을 품은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반성을 하게 된다. 나무 장사로부터 값싸게 나무를 구입한 대신 그 시세 차익을 섯필로 그림을 그리는 가난한 조선의 아이에게 적선을 하는 중국 사환의 모습 속에서 민족적 차별 감정 너머에 존재하는 민중적 연대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한다. 선장은 그 가치를 중국 사환의 행동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船长从幼年时期封闭的排他性民族主义中走出来,通过联系群众,成为了一名国际主义者。不再是局限于要摆脱日本帝国主义的束缚,开展抗日独立运动,而是要让殖民地上饱受野蛮侵略和压迫的民众们真正得到解放。所以读者们应该关注的是作为一名革命家,船长在成长的过程中与群众的密切联系。虽然儿时在元山目睹了元山码头劳动罢工时,对日本船员表示支持的举动无法理解,但后来,在京城一家中国餐馆里,看到中国佣人前后矛盾的两种行为之后,才使他渐渐明白了其中的缘由。事情是这样的,餐馆里的中国佣人和朝鲜柴火商一个劲儿地讨价还价,看到这个场面,船长对那个中国佣人怀有民族偏见。但是很快他意识到那种民族偏见很让人惭愧。他从柴火商那里讨价还价压低价格购买柴火以后,把这些差价钱用来帮助那些用石笔画画挣钱的朝鲜穷人家的孩子,积德行善。从中国佣人身上,他发现了超越国家民族的情怀,并将其上升为民众连带感。这种价值是从中国佣人的行动上学到的。

불쌍한 나무장사 늙은이를 외길목에 몰아넣고 달고 치듯 하는 청요릿집 사환이 밉기가 그지없었다. 강렬한 민족감정이 잠자던 맹수처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었다. 선장이는 곧 달려들어 주먹벼락을 안겨주고 싶은 총동까지 받았다. 그러나 한편, 나무값 10전을 깎아내리는 데 성공한 청요리집 사환은 팔소매를 붙잡은 나무장사를 돌아보고

把可怜的卖柴火的老头儿赶到了独路口,一顿欺负的中国餐馆佣人简直是可恶至极。强烈的民族感情如潜伏的猛兽一样,突然苏醒。船长恨不得马上跑去对那个人暴打一顿。但一方面,能够将柴火价格降下来10分钱的菜馆佣人回头看了看抓着自己衣袖的柴火商说:

그럼 잠간 기다리시오. -접은 고대요…… 바루 조기…… 중화원…… 멀지 않소.

“那么再等我一下。—我家就在那儿……就是那边……中华园……不远吧”。

말하고 예닐곱 발자국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아무 없이 10전짜리 구엉 뜷린 백통전 한 닢을 앞치마에 달린 호주머니에서 꺼내서 그림 그리는 거지아이의 깡통 속에 딸랑 던져 넣어주는 것이었다. 언제가 구릿빚의 동전만이 들어오기 마련인 깡통 속에  난데없이 은빚의 백통전이 날아드는 바람에 영문을 모른 아이가 한 손에 석필을 쥔 채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앞치마 두른 청요리집 사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흥정해놓은 나무바리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선장이의 머릿속에서는 도저히 무어라고 이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해일처럼 뒤설레었다.

说完,马上大步流星地走了六七步,二话没说,从围裙前面的兜里拿出带孔的10分价值的白铜钱,朝着正在画画的乞儿的罐头盒里扔了进去,从来罐头盒里面清一色的都是铜钱,今天突然飞过来银色的钱币,面对此事颇感奇怪的孩子,一手拿着石笔,抬起头,只见菜馆的佣人围裙飞动,头也不回地朝刚才讲价的地方走过去,看到这个情景,船长不知道说什么好,觉得像一阵海啸过后,心潮澎湃

격정시대의 선장을 통해 작가 김학철은 국가 경계를 넘어 민중의 존재를 소중히 인식하고, 민중적 연대를 통해 제국주의의 파행적 근대를 극복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다시 강조하건대. 민족적 차별의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민족이란 배타적 이대올로기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가령, 상해에서 선장이 소속한 항일테러 조직은 서양으로부터 아편을 밀수하여 중국의 민중들에게 유통기켜 막대한 수익을 올려 경제적 부를 누리는 조선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데, 여기에는 민족적 감상주의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激情时代通过塑造船长的形象,表达了作家金学铁认识到突破国家之间的界限,人民群众存在的重要性。决定通过联系群众,来克服近代帝国主义的桎梏。在这里要重申的是,没有余地掺杂民族差别的个人感情,民族的排他意识也没有掺杂进来的余地。例如,在上海的时候,船长所属的抗日暗杀组织计划了一场袭击朝鲜人的行动,该朝鲜人从西洋走私鸦片,在市场上流通,卖给中国百姓,巨额敛财,一夜暴富。所以,在这里民族感伤主义情结彻底排除在外的。

그런데 우리가 제국주의강도를 도와서 대량의 마약을 밀수입해다가 중국민중을 해친다면……그게 뭐가 되겠습니까? 그건 용서 못할 비행입니다. 범죄행위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신영호는 그런 죄약을 저질렸거든요. 기가 1천만 원어치에 헤로인이 밀수입되는 걸 눈감아주구 뇌물을 받아서 벼락부자가 됐단 말입니다. 우리가 일본 놈의 압박을 피해서 중국 땅에 와 살면서 도리어 중국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한다면……그게 뭡니까? 배은망덕두 유분수지요! 신영호의 이번 행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버릇을 한번 톡톡히 가르쳐뇌야 합니다.

“但是我们帮助帝国主义强盗,大量走私鸦片,伤害中国百姓的话,那就成了什么了?那是根本无法原谅的卑劣行径,是犯罪行为。这次申英浩正是犯下了这样的滔天大错。纵容走私市值1千万的海洛因,收受贿赂,一夜暴富。我们为了逃避日本鬼子的压迫,来到了中国,反而做出伤害中国利益的事情,那倒成了什么了,忘恩负义都应该有个限度!申英浩这次的行为是不能原谅的,一定要好好教训他一顿才是。

가실, 신영호는 민족은 해서 무엇하며 나라는 해서 무럿하랴. 신영호씨는 이 세상이 요대로 조금도 변치 말고 천년을 가고 만년을 가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상해의 공공조계와 프랑스조계가 길이 보존되어주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중권, 171)

实际上,申英浩的想法是要民族何用,要国家干什么。希望这个世界保持现在的状态,一点也不要改变,维持千年万年,希望上海公共租界和法国租界永远保存下来。

김학철의 민중적 연대감에 기반을 국제주의적 세계인식은 격정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소중한 문제의식이다. 물론 그 문제의식은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가령, 중국 길림성에서 만보산 사건 일어나 조선 이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중국인에 대한 악감정이 증폭되는 가운데 경성에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속출한다. 조선인과 중국인의 민족 감정이 부딪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이에 대해 선장의 스승인 김영하는 다음과 같이 문제의 핵심을 정획히 간파하고 있다.

金学铁基于群众连带意识之上的国际主义的世界认识贯穿《激情时代》的始终,是非常宝贵的思想意识。当然不可忽视的是这种意识和反帝国主义、反殖民主义密不可分。中国吉林省发生的“万宝山事件”,朝鲜移民和中国公民之间发生强烈冲突,消息传到国内,朝鲜人对中国人的憎恶感油然而生,与此同时,在京城也发生的一系列丑陋事件,朝鲜人和中国人的民族感情一次又一次的发生碰撞。对此,船长的老师金英河(音)准确道出了问题的核心。

다들 왜놈 좋은 하느하구 저러잖니. 방휼지쟁이란 말……너두 알지? 조개하구 도요새가 싸우면……이를 보는 건 어부밖에 없단 말이야. 이건 다 왜놈들이 조선사람하구 중국 사람을 쌈 붙여놓구……어부지리를 보자는 흉계야. 경찰이 보구두 봇 본 체하는 것만 봐두 알 일이지. 뒷구멍으룬 붙는 불에 키질을 하면서두 겉으룬 아닌 보살하는 데 다들 속는단 말이야. 참 어리석지!

“这是日本倭寇干的好事,鹬蚌相争这句话……你也知道吧?鹬蚌相争渔翁得利……让朝鲜人和中国人争斗,这是日本倭寇想坐收渔翁之利而使用的阴谋诡计。你看警察明明看到了这种情况,假装没看见,由此可见,他们这是在背后火上浇油,助长嚣张气焰,在表面上伪装。真是大家都被骗了。

그럼 만보산에서 쌈이 났다는 것두 거짓말입니까?

“那么万宝山事件中的打斗也都是假的吗?”

쌈이야 났겠지. 그렇지만 그걸 이 지경 침소봉대루 떠벌려놓은 건 왜놈들이야. 우리 만족의 철천지원수는 왜놈들이지 중국백성이 아니야. 속지 말아야 해.

“打架事件肯定是有的,但是虚张声势,夸大其词的是日本鬼子,和我们民族有不共戴天之仇的是日本人,不是中国百姓,不要被骗了。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조선과 중국의 민족 감정이 대립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교모한 식민정책의 일환에 기인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조선과 중국 모두 각기 구체적 입장이 다를 뿐, 특히 조선의 경우 항일독립운동을 중국에서 활발히 벌이고 있음을 고려해볼 때 일본의 조선과 중국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식민 정책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도리어 조선과 중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 더욱 공고히 그 민중적 연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他指出,由于“万宝山事件”,朝鲜和中国的民族情绪对立愈演愈烈。这是日本帝国主义者殖民政策中一个非常巧妙的环节。朝鲜和中国只是立场不同而已,特别是考虑到朝鲜的情况,中国抗日独立运动正在激烈的展开。这个时候,卷入日本的殖民政策,是不妥当的事情,因为最终,朝鲜和中国面对日本帝国主义的掠夺,更应该加强民众之间的联系,团结一心。

이러한 김학철의 국제주의적 세계인식은 반전작가인 일본의 가지 와다루씨 부부를 만나면서 더우 깊어진다.

在认识日本的反战作家加治渡(音)夫妇之后,金学铁的国际主义世界认识更加深刻。

가지씨는 동경제국대학 졸업생으로 총정치부와 3청의 풍내초와 동기동창생인데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작가였으므로 당국의 박해를 받아 내외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한 것이었다. 그들 내외와의 상봉은 선장이에게 왜놈이라면 무조건 악귀, 살인귀로만 보여서 이를 갈아왔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두 일본의 지성인은 본국정부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다가 그 박해에 못 이겨 우리 편으로 넘어오지 않았는가!

加治渡是东京帝国大学的毕业生,和总政治部第三厅的是冯乃超同届的同学,身为作家的他反对日本帝国主义发动侵略战争,受到日本当局的迫害后,亡命中国,船长认识了他们夫妇后,彻底改变了对日本人的看法。坐在眼前的这对日本的知识分子,反对本国政府发动侵略战争,无法再忍受当局的迫害,最后站在了我们这边。

이런 일본사람두 있었구나!

“居然还有这样的日本人啊!”

선장이는 시야가 크게 넓어진 같았다. 그와 동시에 가지씨 부부에 대하여 동지적인 사랑까지를 느겼다.

船长真是长了见识,同时,从加治渡夫妇身上,船长甚至感受到了战友情怀。

얼마나 고상한 인간들인가!

   “真是太高尚了!”

이렇게 김학철이 격정시대에서 보이는 국제주의자로서의 세계인식은 일본에 대한 맹목적 반일감정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를 부정하는 양심적 지성인들을 포함하여 민족과 국경의 경계를 넘는 민중적 국제 연대를 통해 반식민주의를 모색하는 있다. 그러하기에 조선의용군이 힘차게 부르는 『인터나쇼날』(국제가)은 언제나 힘을 복돋아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래 인바. 이 노래를 통해 조선의용군은 협소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민중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 식민지 근대를 극복하는 반식민주의를 향한 투쟁의 의지를 다졌던 것이다……

金学铁在《激情时代》所彰显的国际主义者的世界认识并不是一味地怀着盲目的反日情绪,而是通过团结包括一些反对日本帝国主义的有良知的知识分子在内的群众,超越民族和国界,一同摸索反对殖民主义之路。所以朝鲜义勇军唱着《国际歌》这首激昂的歌曲“无产阶级的歌曲,总是给我们力量,总是给我们勇气”。通过这首歌曲,表明了朝鲜义勇军超越狭隘的民族主义,通过团结国际同人反对殖民统治,向着反殖民主义展开斗争的决心……

김학철의 문학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민족문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주요한 역할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김학철의 문학이 한반도와 중국을 가르지르는 공간성을 확보하고 있어, 동아시아의 복잡다기한 근대적 문제들을 배타적인 민적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민중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 반식민주의 문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겅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김학철이 지속적으로 복원하고 있는 조선의용군의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역사적 동력을 동아시아의 평화적 가치를 확산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전화시켜야 한다는 관제가 제기된다.

金学铁的文学打破了故步自封的状态,为民族文化探索出一条新的发展之路。这是因为金学铁将文学的视角延伸到韩半岛和中国,为解决东亚复杂多端的近代问题在文学上提供了可能性,融入了通过团结群众,解决反殖民主义的问题的思想,而不是排他的民族主义观点。在这里,金学铁又提出了一个重大的课题,那就是将朝鲜义勇军抗日武装独立斗争的动力转化为维护东亚和平这一价值上来。

21세기의 동아시아는 아시아의 평화는 물론, 세계의 평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최근의 국제정세는 숨 가쁘게 펼쳐지고 있다. 21세기의 민족문화은 더 이상 일국 중심의 민족문학이 아니라 분단 문학을 넘어 통일문학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통일문학은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김학철의 문학을 통해 확연히 증명되듯, 우리 민족구성원의 항일독립운동의 무대가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고, 바로 그곳에서 민족문학의 훌륭한 성과물이 산출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민족문학의 외면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단순한 외면적 확장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분쟁을 해결하고 평화를 모색하기 위한 소중한 민족문학적 성취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해도 손색이 없다. 김학철의 문학은 그 좋은 사례다. 특히 김학철의 문학이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유호하게 저항하고, 그것들을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논리와 밀접히 관현되어 있다면, 근대 아시아의 역사적 유산으로서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동력, 격정적이고 미완성인 임무는 모두 새로운 아시아 상상으로 전화되 긴요한 역할을 수행할 있을 것이다……

21世纪东亚的和平问题不仅在整个亚洲,甚至在整个世界上都显得尤为重要。围绕韩半岛问题,最近国际形势高度紧张。21世纪民族文化不应该局限于以一个国家为中心,而是应该超越南北界限,朝着统一文学方向发展。但是统一文学也不应该仅仅局限于韩半岛。正如金学铁的文学所证明的一样,我们民族抗日独立运动的舞台遍布整个东亚地区,就是在这里,涌现出我们民族文学优秀的文化成果,扩大了民族文学的外延。但他的意义,不仅仅是单纯扩大了民族文学的外延,更是在文学上解决东亚分争,是探索和平之路的重大胜利。这样高度评价他的价值真的不是言过其辞,金学铁的文学就是一个很好的例子,特别是金学铁的文学“有效抵抗殖民主义和资本主义,近代亚洲的历史遗产,即民族解放运动和社会主义运动的动力,这种充满激情的、尚未完成的任务将转化为新一轮的亚洲崛起。”金学铁的文学正是起到了这样的作用。

김학철의 문학은 새롭게 읽혀야 하며, 김학철 문학에 자리한 민족해방운동의 동력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야말로 반식민주의에 기반한 평화를 추구하는 문학의 가치를 드높여줄 것이다.

金学铁的文学应该以新的角度重新读一读,以现代的视角重新解读金雪铁文学中的民族解放运动的动力,才能在反殖民主义基础上,真正提升追求和平这一主题的文学价值。

26.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

26.难以忘怀的人们

김학철과 정령

金学铁和丁玲

정령과의 기나긴 세월에 얽힌 잊을 없는 사연들을 김해양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在漫长的岁月中,和丁玲有太多的难以忘怀的故事,金海洋是这样写到

1986년 3월 3일, 고요한 밤하늘에 어둠이 깃들었는데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멀리까지 정적을 깨뜨렸다. 북경전보요! 북경전보여! 급송전보가 것이다. 수신인은 김학철. 급기야 봉투를 뜯어보니 丁玲病危 陈明 (정령의 병세가 위급함 진명) 여섯 글자가 눈에 안겨왔다. 진명은 정령의 남편이다.

1986年3月3日,夜晚,寂静无声,突然响起一阵敲门声,打破了周遭的寂静。“北京急电!北京急电!”是有人送来紧急电报。收信人是金学铁,打开信封,映入眼帘的是这样的6个字“丁玲病危 陈明”,陈明是丁玲的丈夫。

김학철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 한참만에야 쌍지팡이를 짚고 창문가로 다가가 어두운 밤하늘을 하염없이 내다보신다. 가족들에게 한 번도 눈물을 안 보이신 그였다. 수십 년을 마음의 고락을 함께 해 온 스승이자 전우이신 정령을 잃지는 않는 것인가!

金学铁的脸瞬间凝固了。好一阵才拄着双拐,走向窗前,迷茫地望着黑色的天空。他从来都没有在家人面前掉过眼泪。丁玲与金学铁是几十年同甘共苦的、既是老师,又是战友,在心里,金学铁似乎感到丁玲就要离我们远去。

정령은 다음날 기어이 가시고야 말았다.

但是第二天,丁玲黯然离世了。

김학철이 정령을 일방적으로 만난 것은 1941년 팔로군 섬북항일유격 근거지. 정령은 당연히 자신의 강연을 듣는 사람 중 김학철이란 젊은 군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김학철은 자신이 가장 승배하는 노신선생의 전우로써 정령을 존경하였다.

金学铁认识丁玲是1941年八路军陕北抗日游击根据地。那时,丁玲当然不会知道,听自己演讲的听众队伍里会有金学铁这样一位年轻军官。丁玲是金学铁非常崇拜的鲁迅先生的战友,自然非常尊敬她。

그러나 저물 무렵 김학철은 일본군과의 교전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포로,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서 4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정령은 그 다음해인 1942년 모택동의 연안문예좌담회에 참석하였지만 혁명에 대한 충성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모택동은 일찍이 1936년 연말 연안에서 정령을 위해 『临江仙(림강선)이란 시를 써서 전방에 있는 정령에게 군용전보로 보냈는데 정령을 어제의 소저, 오늘의 무 장군 되었네.라고 칭송하였다. 그 후 정령은 1948년에 장편소설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로 1951년 소련에서 스탈린문예상을 받았다. 당시 중국 문학계에서는 최고의 영예였다. 훗날 이 책은 12개국 언어로 번역 출판 되었는데 조선어판은 김학철이 손수 번역하여 1952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당시 책값은 인민페로 19,000원.

但是那一年金学铁在和日本交战交战过程中,腿部受了枪伤,成为日本军的俘虏。被押送到日本的长崎监狱服刑4年,丁玲在第二年,也就是1942年参加了毛泽东的延安文艺座谈会,但是对于革命的忠诚态度一点也没有改变。毛泽东早在1936年年末,在延安为丁玲写了一首诗,叫做《临江仙》,通过军用电报发送给前线的丁玲,赞颂丁玲“昨天的文小姐,变成今天的武将军”,后来,丁玲在1948年写的长篇小说《太阳照在桑干河上》在1951年荣获斯大林文艺奖。当时在中国是文学界的最高荣誉,后来,这本书被翻译成12种语言,朝鲜语版的由金学铁亲自翻译,1952年在延边教育出版社出版,当时书的价格标价为人民币19000元。

정령과 김학철이 본격적으로 알게 것은 일제투항 감옥에서 풀려난 김학철이 서울-평양을 두루두루 결쳐 (거기에 얽힌 사연은 충분히 장편소설이 될 것이다.) 두 일본헌병에 의해 호송되어 피 흐르는 다리를 끌며 떠났던 북경을 (1942-1950) 8년 만에 외다리로 되돌아 왔을 무렵이다.

丁玲和金学铁正式见面认识是在日本帝国主义投降之后,出狱的金学铁经过首尔—平壤(在这段时间经历的事情都可以写一部小说了),回到了当年由两位日本宪兵护送腿还淌着鲜血离开了的北京1942-1950),也就是8年过后,他拄着拐杖拖着一条腿回到了北京。

당시 정령은 중국 중앙문학연구소 소장이고 김학철은 연구원이었다. 정령은 김학철의 경력보다 그의 성격을 더 좋아했다. 하여 중앙정부에서 배당한 이화원의 운송소와 소와전 앞뒤 집을 나누어 쓰게 되였으며 하기방 (1912-1977), 애사기(1910-1966), 애청(1910-1996), 역양(1908-1964) 등과 자주 모이게 되였다. 하기방은 시인, 산문가, 문학평론가로 해방후 하기방현상 장본인이고 애사기는 중국 마르크스주의 원로 철학가. 애청은 어찌하여 나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는가? 그것은 이 땅에 대한 나의 사랑이 너무 깊기 때문일지라……라는 유명한 시구로 중국의 여러 세대 청년들의 심금을 올렸었다. 그리고 역양 역시 쟁쟁한 시인이었다.

当时丁玲是中国中央文学研究所的所长,金学铁是研究员,比起金学铁的经历,丁玲更喜欢他的性格。中央政府给大家安排了颐和园的云峰巢和邵窝殿前后房子,供大家居住,何其芳(1912-1977)、艾思琪(1910-1966)、艾青(1910-1996)、力扬(1908-1964)等人经常聚在一起。何其芳是诗人、散文家、文学评论家。解放后是“何其芳现象”的主角,艾思琪是中国马克思主义的元老哲学家,艾青的诗句“为什么我的眼里常含泪水,因为我对这片土地爱得深沉”,扣动了中国几代人的心弦。还有力扬是一位出色的诗人。

정령부부는 그때 살인 나를 가끔 집에 데려다 재우고 맛있는 것을 사주기었다. 훗날 정령부부께서 연길 우리 집으로 오셨을 때 정령의 신 끈을 매여 드렸더니 네가 여릴 때는 내가 끈을 주었는데 오늘은 반대로 되었구나라고 한탄하셨다.

丁玲夫妇那时候偶尔带我回家,哄我睡觉,给我买好吃的。后来,丁玲夫妇来到我们延吉的家的时候,我为她系鞋带,她感叹说道:“你小的时候,我给你系鞋带,今天居然反过来了啊”。

1952년 가을, 연변의 주덕해와 최채의 초청으로 김학철은 연변문련을 창립하기 위해 편안한 북경생활을 포기하고 당시 시골과 같은 연길로 이주했다. 주덕해는 김학철과 같은 의용군 출신이자 김학철의 매부인 왕련장군과는 모스크바 유학시절 절친한 친구였다.

1952年,应朱德海和崔采的邀请,金学铁要创办延边文联,为此,他放弃了北京舒适的生活,搬到了当时和农村一样的延吉,朱德海和金学铁都是义勇军出身,和金学铁的妹夫王连(音)将军在莫斯科留学的时候,是非常要好的朋友。

정령과 김학철은 아름다운 이화원 곤명호반에서 갈라질 얼마나 험난한 인생의 길이 각자를 기다리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金学铁和丁玲在美丽的颐和园昆明湖畔离别的时候,不会想到,等待他们的将会是多么坎坷的生活。

1955년 정령은 정령, 진기하 반당집단 정령, 풍설봉 우파반당집단 요원으로, 김학철은 배극, 김학철 페테피구라구 성원으로 20여년의 기나긴 고난의 행정을 시작해야 했다.

1955年,丁玲被定为“丁玲,陈企霞反党集团”“丁玲,冯雪峰右派反党集团”的成员,金学铁被定为“裴克,金学铁,裴多菲俱乐部”的成员,从此,开始了长达20余年的多灾多难的人生旅程

정령, 진기하 반당집단 주요 성원으로는 정령, 진기하, 풍설봉, 애청, 라봉, 백랑, 진명 등이었다.

“丁玲,陈企霞反党集团”的主要成员有丁玲、陈企霞、冯雪峰、艾青、罗峰、白朗、陈明等人。(人名音译)

세상에 역사보다 재미있는 소설은 없을 것이다. 정령을 기어이 반혁명으로 내몬 장본인은 좌련 때부터 노신을 반대해온 주양(1908-1989)이었다. 주은래는 주양과 정령은 서로 무서운 편견을 갖고 있으므로 심사(졍령문제)할 때 그들 둘이 직접 만나는 것은 피면토록 해라. 지시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1958년 1월19일 정령의 작품들을 비료가 독초 비유하고 혁명자의 허울을 쓰고 반혁명적인 글을 쓰고 있다 박음으로써 당시 당중앙 선전부 부부장이었던 주양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주양이도 1967년 요문원에 의해 반혁명 양면파 주양으로 타도되어 쓴맞을 실컷 보얐다.

在这个世上,没有比历史更有意思的小说了。丁玲最终成为反革命,罪魁祸首是“左联”时期开始反对鲁迅的周扬(1908-1989)。周恩来曾经指示说“丁玲和周扬对对方都怀有严重的偏见,在审讯的时候,不要让两人碰面为好”,但是毛泽东在1958年1月19日,形容丁玲的作品是“毒草成了肥料”,“带着革命家的面具,写着反革命的文字”,将其定性,站在了当时是党中央宣传部副部长周扬的这一边。可是周扬最终因为姚文元被打倒,扣上了“反革命两面派的帽子”彻底尝到了苦头。

하여 정령은 1957년 흑룡강 망망한 북대황에서의 장장 13년 동안의 추방생활로부터 1970년 북경 진성감옥에서의 옹군 5년 동안의 독방사리를 거쳐 1975년 석방된 뒤에도 산서성 농촌에 가서 4년간 정배살이를 해야 하였고 김학철은 건국 이후의 중국역사에서 처음으로 대약진 인민공사 및 모택동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팽덕회의 진정한 사희주의를 제창한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의 필화사건으로 웅근 10년 동안 연길 간수소와 돈화 추리구에서 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丁玲1957年在黑龙江茫茫无尽的北大荒开始了长达13年的流放生活。1970年在北京秦城(音)监狱牢房里呆了整整5年,1975年被释放后,又被发配去山西省的农村,熬了4个年头。在建国后,金学铁第一个在中国历史上批判大跃进人民公社和对毛泽东的个人崇拜,因为写了《21世纪的神话》一书,提倡彭德怀的真正的社会主义,而犯下了文字狱,在延吉的看守所和敦化的秋梨沟监狱度过了整整10年的狱中生活。

얼음이 녹기 시작한 70년대 말 정령은 귀향사리에서 풀려 북경으로 되돌아왔다. 신문에서 정령의 소식을 알게 된 김학철은 흥문하여 저더러 큰소리로 기사를 두번이나 다시 읽으라고 하셨다.

70年代末,局势一点点缓和的时候,丁玲返乡回到了北京,当金学铁在报纸上看到这个消息的时候,兴奋地让我大声读了两遍

정령의 소식이 얼마만이야.

“多久没有丁玲的消息了”

하지만 김학철은 당시 자신은 아직도 헝기가 차서 석방된 분자 인지라 해방된 정령에게 누가 마칠까봐 저더리 중국작가협회 주소로 정령에게 편지하게 했다.

但当时,金学铁还是刑满释放分子,怕连累刚刚获得自由的丁玲,把信寄上了中国作家协会”的地址上

나의 편지를 받아보신 정령은 깜짝 놀라 즉시 사랑하는 꼬마해양이란 편지를 1979년 6월 22일 보내주셨다. 편지에서 정령은 나의 아버지 김학철은 우리가 줄곧 마음속에 새겨두고 있었다. 강제노동의 나날에도, 지어도 감옥에서도 기어코 잊을 수 없었지…….라고 뜨거운 감정을 담아 보내주셨다.

收到信,丁玲很是惊讶,随即1979年6月22日以“亲爱的小孩儿海洋”为题,给我寄了一封信。在心中,丁玲饱含深情地写道:“我们一直把你的父亲金学铁记在心上,在强制劳动的每一天里,甚至在监狱里也绝对不会忘记。

정령은 번이나 꼬마해양에게 편지를 해도 김학철의 친필 편지를 받지 못해 인내심을 버리고 직접 전우이자 학생인 김학철에세 먼저 편지 쓰셨다.

后来,即使丁玲两次给“小孩”海洋寄信,也收不到金学铁的亲笔信,终于按捺不住,给既是战友,又是学生的金学铁率先寄信。

학철 동지:

学铁同志:

  상건하(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 한 권을 보내드리오니 받아보시기  바라오.

给你寄去一本桑干河(太阳照在桑干河上),希望你能读到

오랫동안 자네 아들의 편지를 받아보지 못했소, 참 보고 싶구려. 문대회(文代会 1979년 중국문학예술인 제4차 대표대회)회의 중 김철 동지를 만나서 자네 이야기를 하였더니 동감을 표시하더군. 자네 문제가 좀 해결되고 있는지?

很长时间都没收到你儿子的信了。颇想念你,文代会(1979年中国文学艺术第4次代表大会)上见到了金哲同志,提起了你,深有同感,不知道你的问题解决了没有?

나한테 글자 적어서 보내주구려. 어쩌면 자네가 나한데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给我写几句话吧。你怎么有不给我写信的道理呢?

나는 자네 가정을 문안하네. (인사말을) 끝머리 글로 고쳐서 문안하네.

向你们全家致以问候,问候的话放在最后了。

자네 건강하기를 바라네.

望身体安康。

정령 2.1. (1980년 2월 1일)

                               丁玲 2.1(1980年2月1日)

  보내온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 페이지에는 정령의 멋진 사인이 정답게 안겨왔고 정령의 젊은 시절의 미인 사진이 반겨주었다.

翻开《太阳照在桑干河上》的第一页,映入眼帘的是丁玲的签名和年轻时她美丽的照片。

1980년 12월 김학철은 복권되어 또다시 창작의 고봉기를 맞게 되였고 정령과의 연락도 많아졌다.

1980年12月,金学铁恢复了名誉,重新迎来创作的高峰期。和丁玲的联系也日益频繁。

특히 1981년 8월 9일 정령부부는 장춘에 회의 가실 기회를 마련하여 일부러 연길로 김학철을 보러 내려오셨다. 동행하신 이로는 누적이부부. 누적이(1905년~)는 소설가 겸 번역가. 그 역시 노신의 전우로서 1920년대 초부터 중국문단에서 활약하였다.

特别是1981年8月9日,丁玲夫妇去长春开会,特意转到延吉去看金学铁。和她一起同去的是楼适夷夫妇,楼适夷(1905年~)是小说家兼翻译家。他是鲁迅的战友,在20世纪20年代活跃在中国的文坛。

그날 저녁 정령부부와 김학철 부자 넷이서는 가는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그렇게도 오랫동안 정치적 고통을 당했지만 단 한가지만은 일치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즉 마르크스주의 신념이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말로써는 형용하기 힘든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이겨낼 수 있게 하였다. 정령은 김학철의 용감성을, 당당함을 자람스럽게 여겼다. 그야말로 정령의 동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날 나눈 더 깊은 이야기는 정치적환경이 주어지면 전부 말하게 될 것이다.

那天晚上,丁玲夫妇和金学铁父子四人彻夜长聊,他们虽然很长时间遭受了政治的痛苦,但唯独有一点一直都没有动摇—那就是马克思主义的信念。这个信念让他们忍受了难以言喻的肉体和精神的痛苦。丁玲为金学铁的勇敢正直感到骄傲。这才是丁玲的战友。那天晚上谈的更深入的话题如果政治环境允许的话,会全部说到的。

북경에 돌아가신 정령부부는 진명의 필체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回到北京后,陈明亲笔写了一封信,内容如下:

학철 동지:

学铁同志:

연변 정거장에서 손잡고 이별의 정을 나눈 , 마음속은 줄곧 불안하였습니다. 당신이 쌍지팡이를 집고 빗물이 고인 밤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릅니다. 집으로 편안히 돌아갔는지, 휴식은 제대로 하였는지, 지금 몸은 괜찮은지? 편지에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바랍니다.

我们在延边的火车站作别后,我的心里一直不安。您拄着双拐,趟着雨水走夜路的情景在眼前历历在目。是否平安到家,休息得怎样,现在身体好不好。希望常写信告诉我们好消息。

  우리는 12일 북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우리 둘 다 감기에 걸려 지급 약을 챙겨 먹습니다. 건강이 회복되고 있으니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我们12日回到北京。可是碰巧我俩都感冒了,如今服了药,身体已经恢复了,不要担心。

있을 외국 나들이를 준비해야 되고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아서 먼저 글자 적어 보냅니다. 당신과 당신의 가정에 안부를 전합니다.

马上要准备出国了,还有各种琐碎的事情要处理,先写这么多吧,祝愿您和您的家庭幸福安康。

손을 잡습니다.

一起努力吧!

                                      진명 8.18. 새벽

                                       陈明8.18凌晨

다음해인 1982년 9월 정령부부가 대련에 체류하실 때 딸 조혜를 선물을 들려 연변으로 보내시면서 『호야빈 선집』을 보내왔다. 호야빈(1903~1931)은 1930년대 로신선생이 정신적지주인 중국좌익작가련맹(1930~1936)성원으로 1931년 2월 7일 상해에서 국민당 당국에 의해 비밀리에 처형당한 중국현대시에  유명한 좌련5렬사중의 사람이다. 그가 바로 정령의 전 남편이었다.

第二年1982年9月的时候,丁玲夫妇在大连停留的那段日子,把女儿送到延边,并送来《胡也频选集》作为礼物。20世纪30年代,胡也频(1903-1931)是鲁迅先生的精神支柱即中国左翼作家联盟(1930-1936)的成员,1931年2月7日,在上海被国民党当局秘密处决,是中国现代史著名的《左联五烈士》中的一员。他就是丁玲的前夫。

  정령의 사인이 있는『호야빈 선집』에는 정령의 친필로 정령부부의 편지가 끼여있었다.

在这本有着丁玲的签名的《胡也频选集》,内附着丁玲夫妇的亲笔书信。

학철 동지:

学铁同志:

오랫동안 편지 하지 않은 같은데, 무소식으로 짐작하여 온 집안이 편안한 것 같군, 그러기를 또한 충심으로 바라고요, 자네의 소설은 얼마나 쓴 건가? 나의 장편은 늘 (잡일에) 지장을 받아 일 년 동안 조금밖에 쓰지 못했어. 모여서 책으로 되면 당연히 보내 줄 걸세.

好久都没有给你写信了,一直都没有消息,你的家庭应该是幸福安稳的状态。小说写了多少了?我的长篇小说总是遇到不少闲杂之事,一年内都写不了多少,如果汇集成书的话,我一定给你寄过去。

우리 조헤가 연길로 가는 길에 『야빈선집』 한권을 보내오. 받아두고 (야빈을) 기념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 사탕 한 곽은 손자에게 주는 것이오.

我女儿在去延吉的路上,给你送去一本《也频选集》,希望留为纪念吧,还有一盒糖是给孙子的。

자네들이 명절 분위기로 즐겁기를 바라네!

希望节日愉快!

   가정이 건강하기를!

全家安康!

                                         정령

                                         진명 8월 27일 대련 (1982년)

丁玲

                                         陈明8月27日大连(1982年)

그러나 세월은 무정했다. 정령의 행복한 나날은 그리 길지 않았다.

可是岁月是无情的,丁玲的幸福生活没有持续多久。

1986년, 그이는 영영 우리를 떠나고야 말았다. 정령(1904~1986)의 본명은 장위, 호남 림례 사람이다. 그의 유체를 덮은 붉은 기에는 큼직하게 네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정령불사(정령은 죽지 않는다).

1986年,她与世长辞。丁玲的本名叫蒋伟,湖南临沂人。遗体上覆盖的红旗上赫然写着四个大字—丁玲不死。

김학철은 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金学铁给他写了最后一封信。

진명 동지:

陈明同志:

  우리 함께 고통을 나눕시다!

让我们一起分担痛苦吧。

세계 모든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그를 위해 슬퍼하고 있습니다.

全世界所有正直善良的人都为她的去世感到悲哀。

사람들은 역사는 공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이에 대해서도 그러했습니까? 이십여 년의 가슴을 써늘하게 하는 학대, 그때가 바로 그이의 창각의 황금시절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인류 공동의 문학재부가 북대황의 황야에 묻혀버렸습니까. 선유선보, 악유악보(선한 자에게는 선이 차려지고 악한 자에게는 악이 차려진다.) 정녕 누가 말했던가요. 귀신이나 물어가라지요. 나는 노신처럼 누구의 동정도 필요 없고 또 누구도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를 위하여, 노신의 전우들을 위하여, 비극이 또다시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 모두 손잡고 끝까지 싸웁니다.

人们都说历史是公平的。但对她也是如此吗?20余年饱受精神虐待,那段时光,也正是她创作的黄金时期。有多少人类的共同财富埋葬在北大荒的荒野。善有善报、恶有恶报这句话到底是谁说的?见鬼去吧。我要像鲁迅一样,不需要任何人的同情,也不会原谅任何人。为了正义、为了鲁迅的战友,为了不让悲剧再次重演,我们并肩携手,一起战斗吧!

당신, 진명에게, 그리고 조림에게, 조혜에게, 나는 무엇이라고 이 아픈 마음을 전하리오? 다만 멀리서 당신들의 손을 잡을 뿐입니다. 굳게!

对您、对陈明、对祖林和祖惠,我不知道说什么能表达我的悲痛之情,只能在远方,握住你们的手,要坚强!

김학철 86.3.13.

                                  金学铁 86.3.13

김학철과 오오무라 마스오

金学铁和大村

  오오무라 교수는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인데 1985년 연변에서 윤동주 묘소와 생가 등을 발굴하고 후에도 해마다 부부동반으로 연변을 찾고 김학철 선생 일가와 친밀한 교분을 유지했다. 최근 김학철 선생과의 대화를 「김학철 선생의 발자취」라는 글로 정리하고 지금도 김학철 선생의유가족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다. 오오무라 교수는 또한 1990년대 초 필자(김호웅)가 와세다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가 있을 때 초천하고 기르쳐 주신 스승이기도 하다.

大村是日本早稻田大学的教授,1985年在延边尹东柱的坟墓和故居被发掘后,每年夫妇都一同去延边,和金学铁交情甚好。最近,和金雪铁先生的对话被整理收录在《金学铁先生的足迹》一书里,直到现在,和金雪铁的家人也有很深的感情。20世纪90年代初笔者(金虎雄)去早稻田大学客座研究员的时候,大村教授是特邀并给我授课的老师。

오오무라 교수의 「김학철 선생에 대한 생각」과 「김학철 선생님의 편지」라는 글을 통해 김학철선생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있다.

通过大村教授的《对金学铁先生的思考》、《金学铁先生的信》可以看到金学铁生活的点点滴滴。

(1) 김학철 선생님의 편지

(1)金学铁先生的信

  김학철 선생님이 저에게 보내신 편지가 4통 남아 있다. 처음 2통은 중국작가협의희 연변분회 김학철 되어 있어며 나중 2통은 연길시 충류가 2-2-4, 개인주소로 되어 있다. 이 4통의 편지를 그대로 묻어두는 것이 안타까웠던 차에 이번 기회를 통해 공개하기로 하였다.

    金学铁先生给我们寄来的信一共还剩4封。前2封上面标着的是“中国作家协会延边分会金学铁”,后2封的地址留的是个人地址,写的是延吉市总柳街2-2-4。这4封信就这么放在那里实在太可惜了,借此机会打算公诸于众。

내가 최초로 연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5년 4월부터 1986년 4월까지의 1년 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김학철 선생님 댁에 주 1회씩 드나들면서 선생님의 반생을 녹음테이프 10개에 녹음하였다. 그 일부는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2』(연변인민출판사)에 역재되어 있기도 하다.

我第一次去延边是在1985年4月开始到1986年4月份,在这一年间,我几乎一周去一次金学铁先生家,将先生的半辈子的故事收录在录音磁带里,共10张,其中的一部分刊载到《朝鲜义勇军最后的分队长金学铁2》(延边人民出版社)里面。

번째 편지는 1986년 봄 귀국한 후, 당시 연길에 데리고 갔던 딸 오오무라 미치노를 염려해주신 내용의 글이다. 짧은 문장 속에 미치노에 대한 자애와 필자에 대한 정애가 함께 스며 있다.(편지1)

第一封信是在我1986年春天回国之后,对我的女儿大村三千野表示惦念的内容。短短的一段文字,尽显先生对三千野的慈爱和对笔者深切的感情。(信件1)

   번째 편지는 1988년 12월 26일에 씌어진 것으로, 연길에서 투함한 편지인데, 당시는 우편사고 인해 한국에서 수취가 불가능한 일이 있었던 시대여서, 선생의 편지를 내가 맡아 가지고 갔다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보냈다. 그랬더니 금방 한국에서 무사히 편지를 받았다는 통지내용이다. 한국에 보내는 편지를 이런 방법으로 대신 보내드렸던기억들이 있다.

第二封信是在1988年12月26日写的,是从延吉投函的,当时由于发生了“信件事故”,在韩国收不到信件,先生的信都由我带到日本之后,再邮寄到韩国。所以很快得到韩国顺利收到信件的通知。在记忆中,就是以这样的方式代替往韩国邮信的。

번째 편지의 후반 내용은, 북경 민족학원(현재의 중앙민족대학)에서 유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던(현재도 북경 거주) 미치노에 대한 배려의 내용이다. 선생님께서 미치노라는 이름의 유래를 물으신 적이 있는데,그것이 삼천리 자유롭게 달린다는 의미라고 알려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무릎을 치고 기뻐하시면서 미치노를 더할 나위 없이 귀애해주셨던 것이다.(편지2)

第二封信后半部分的内容是对当时在北京民族学院留学的三千野表示关怀的内容。先生问起过“三千野”名字的由来,我告诉他,名字的意思是自由自在奔跑“三千里路”的意思,先生听完后,高兴地直拍膝盖,对三千野更是疼爱有加。(信件2)

   번째 편지에는 2회 KBS해외동포상 수상장 확정이라는KBS의 통지서가 동봉되어 있었다. 선생은 이 시기에 특별상 받으셨다. 소개문에 중국, 작가, 항일투사 되어 있었다.

与第三封信一起寄来的是“第2届KBS海外同胞奖最终获得者”的KBS的通知书,这个时期,先生获得的是“特别奖”,在简介中介绍先生是“中国、作家、抗日斗士”。

편지는 1994년 7월 1일 씌어진 것이로서, 집사람의 요통을 염려하시면서 약 걱정을 해주신 내용이다.

这封信写于1994年7月1日,内容是担心我妻子的腰部健康状况,嘱咐用药的内容。

선생님께 선물로 드린 에도 풍령 최근 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하시는 내용도 들어 있다. 물론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싸운 분이시긴 하나, 일본 서민의 생활상과 풍물은 좋아하셨다. 언제였던가, 일본 물건 중에 뭔가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다음 번 올 때 가지고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황성의 달』(일본가곡)의 오르골(자명금)과 다이후쿠(팥이 들어간 찰떡)를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오르골은,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때 야간 심리전의 일환으로 『황성의 달』을 확성기로 틀어서, 일본 병사들을 향수에 잠기에 하여 전투의욕을 잃게끔 한 경험이 있었다고 하시는데, 한편으로는 『황성의 달』이 갖고 있는 센티멘탈리즘에도 공명되는 바가 있으셨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还有,最近送给先生的礼物“江户风铃”不怎么响了,先生很是难过,虽然对先生来说,日本军队是敌人,但是他却很喜欢日本风土人情,记不得是什么时候了,我对先生说“如果有喜欢的日本玩意儿,您就说,下次来的时候我带来”。先生说他喜欢演奏“荒城之月”(日本歌曲)的自鸣琴,和大福打糕(用豆做的打糕),在与日军作战的时候,自鸣琴是心理战的一个环节,有一次,使用扩音器,弹奏“荒城之月”,士兵们纷纷沉浸在乡愁之中,丧失战斗意志,但从另一个角度来说,也可能是“荒城之月”本身带有伤感的意味,引起了大家的共鸣。

다이후쿠도 추억을 되새겨 보고 싶어서 말씀하신 것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8.15 해방으로 이사하야 형무소를 나오게 되셨는데, 건국준비위원회가 마련한 목조선(철강선은 어뢰 때문에 위험)에 승선하시기 전에, 하루 동안 자유시 간이 었었다고 한다. 이 때 거리에서 행상 할머니한테 다이후쿠를 사 드신 적이 있는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1993년 선생님이 처음 일본에 오셔서 와세다대학에서 강연을 하셨을 때, 숙소인 도쿄 간다 한국YMCA의 어느 방에서, 딸이 약속한 그 다이후쿠를 가져다 드렸더니, 2개까지만 드시고 3개째는 들지 못하셨다.(편지3)

笔者认为提起大福打糕也是想重温一下当时的记忆。由于8月15日大陆解放,先生从谏早监狱出来,在登上建国准备委员会制造的木船(因为海上有鱼雷,钢铁船是很危险的)之前,有一天的自由活动时间,这个时候,他曾经从流动小摊的奶奶那里买过一个大福打糕,一直都无法忘记它的美味。1993年先生第一次来日本,到早稻田大学做讲演的时候,宿舍的位置安排在东京神田韩国YMCA的一个房间,女儿按约定给先生带了大幅打糕,先生只吃了2个,到第3个的时候,再也吃不下了。(信件3)

번째 편지는 1995년 7월 17일에 씌어진 것이다. 이것은 내가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판결문을 발견해서 복사를 해서 드린 적이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 일로 야단을 맞고 말았던 내용이다. 물론 치안유지법으로 신병이 구속되어 있는 상황 하에서의 재판이, 김학철 선생님의 의지를 철지하게 무시한 것이니, 신뢰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일본 관헌 측이 어떨게 보고 있었는가 하는 면에서 참고는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었는데, 결과는 참담했던 것이다. 선생님께는 선생님 나름의 생각이 있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용군 취후의 분대장 김학철1 』에 번역 게재되어 있는 바를 보면, 역시 판결문 찿기 작업은 헛된 고생만은 아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편지4)

4封信写于1995年7月17日,这封信起因是我发现了长崎地方裁判所判决书,给他复制了一份,意外的是反而被批评。当然,是根据治安管理法被拘留的判决是完全无视金学铁个人意志的行为所以不能信赖是可想而知的但是为了解当时日本当局对此事的态度,具有一定的参考价值的。不了,结果很惨淡。先生一定是有自己的道理。但是从《最后的分队长金学铁1》刊载的译文来看,找到的判决书并不是徒劳无功,还是发挥了一定的作用。(信件4)

편지1 [원문:일본어]

信件1[原文:日语]

미치고 양은 일본을 출발하던 , 대설로 고생하셨지요?

三千野去日本的那天,雪下得很大吧?

고생 많으셨습니다.

真是辛苦了。

편지2 [원문:일본어]

信件2[原文:日语]

9월 서울에 보내주신 편지, 감사드립니다. 틀림없이 받았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너무도 죄송합니다만, 한번 더 도착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谢谢您帮我把9月冬天写的信邮寄到首尔,信肯定是收到了,不好意思,麻烦再帮我邮下一封好吗?

『天池(천지)』1월호는 이미 도착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我想《天池》1月号已经邮到了。

사모님께도 안부 전해 올립니다.

向夫人表示诚挚的问候

  안녕히 계십시오.

祝您安康

                                 김학철 88년 12월 26일

                                      金学铁 88年12月26日

마치노

三千野小姐:

  북경 생활, 이젠 익숙해졌나요?

北京的生活,现在已经习惯了吧?

겨울 방학 일본에 돌아가시면, 동봉한 편지와 사진을 아버님께 전해 드려주세요.

寒假要是回日本的话,附带的信和照片请帮忙转交给你的父亲。

편히 지내시길.

祝你愉快

                                 김학철 88년 12월 26일

                                  金学铁 88年12月26日

편지3 [원문:일본어]

信件3[原文:日语]

大村 先生(오오무라 선생님) 내외분께

致大村先生夫妇:

  지난해 주신 편지 받는 길로 집사람이 腰痛(요통)에 가장 좋다는 약- 天麻丸(천마환)(有神效 유신효) 한 小包(소포)를 부치려 했으나 우체국에서 받아주지 않아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麝香(사향), 天麻(천마), 云南白药(운남배약) 등은 다 금수품목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금년 여름에 오시면 한 보따리 구해드릴 테니 꼭 오십시오.

去年收到您的信时,我的妻子想把对腰疼病有显著疗效的“天麻丸”寄给您,说是有奇效,但是邮局不接收。因为麝香、天麻、云南白药都是禁运的项目,所以没邮过去。今年夏天您要是过来的话,我会给您准备好一大包的,一定要过来哦。

三千野(미치노)양은 방학이라 귀국했겠지요.

放假了,三千野小姐也回国了吧?

이곳 河南(하남) 거리에 《삼천야(三千野) 小吃部(소흘부)》 [경식당]라는 간판이 내걸렸습니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참으로着想(착상)이 奇拔(기발)한 간판입니다.

这边的河南街道上有一家小店叫“三千野小吃部”,虽然我没进去看过,但是不得不说这个店牌的名字起得真是新奇独特。

惠赠(해증)하신 《江户(에도) 风铃(풍령)》을 방문에 매달았더니 문이 여닫길 적마다 玲珑(영롱)한 소리를 내 仙境(선경)에 사는 것 같더니 어떡하다 铃(령)에 금이 갔는지 요즘은 浊音(탁음)으로 변해 매우 失望的(실망적)입니다.

您惠赠给我的江户风铃,我挂在了房门上,每次开关门的时候,都发出玲珑的声音,这个世界宛若仙境一般,但不知道是为什么,铃上好像出现裂痕,音色渐渐变成了浊音,有点失望。

내외분께서 내내 건강하시기를 발고 바랍니다.

希望您和您的夫人身体健康

 김학철 94.7.1

                                      金学铁94.7.1

편지4 [원문: 한국어 및 일본어]

信件4 [原文:韩语和日语]

大村 先生(오오무라 선생님) 내외분께 [이하 한국어]

大村先生夫妇 [以下是韩语]

동경에 체류하는 동안, 폐를 너무 많이 끼쳐 드려, 무어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呆在东京的那段日子,真的是给你们添了不少麻烦,感激之情无法用言语表达。

미치노양은 지금 아르바아트로 여념이 없겠지요.

三千野小姐现在在专心打工吧?

岩波(이와나미)서점이 大塚(오오츠카)씨에게 大村 先生(오오무라 선생님)을 소개했는데, 련계가 제대로 되셨는지요.

我向岩波书店的大塚先生介绍了你,你们取得联系了吧?

刑事判决书(형사판결서)란 의례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被告(피고) 直告(이실직고)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다음 하물며 증거에~부터 일본어] 하물며 증거에 입각한 수사가 불가능한 경우, 피고의 공술은 신빙성 제로입니다. 때문에 판결서의 문면을 근거로 전기 같은 것이 씌어졌다면 대오류요. 대실례올시다. [다음 지금 ~부터 마지막 행까지 한국어]

你要知道,刑事判决书历来都是满纸谎言,从来不会让被告以实相告[下面从‘更何况证据~’开始是日语]更何况他们从不会依照证据去展开搜查,所以被告的供述可信度为零。 因此,如果判决书的字里行间写得都像是传记似的话,就可认定为是大错特错的弥天大谎。[下面“现在中国和”开始到最后一行是韩语]

  지금 中国(중국)과 韩国(한국)의 出版社(출판사)들에서 저에게 自(자전) (回顾录 회고록)을 써달라는 (청탁)이 여러 곳 들어와 있습니다. 考(고려)하는 중입니다. 아직까지는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现在很多中国和韩国的出版社纷纷托我写自传,我还在考虑中,现在还没有做决定。

이번 访(방일)에서는, 일본 벗들을 많이 사귀였고, 또 배운 것도 여간 많지가 않습니다.

这次去日本,交了很多好朋友,学到了很多东西。

秋子(아키코) 녀사께는 신세를 너무 많이 져뇌서, 어쨌으면 좋겠는지 모르겠다고, 집사람이 자꾸 뇌고 있습니다.

我们欠秋子很多人情,不知道怎么补偿她为好。我妻子总是念叨着她。

  안녕히들 계십시오.

祝家人安康

                                      金学铁、金惠媛顿首

                                            七月十七

(1)  김학철 선생님에 대한 생각

(2)关于金学铁先生的思考

김학철선생님을 처음 만나 것은 1985년의 일이다. 그때 나와 아내는 연변대학교에 몸을 담고 1년간 연길에 체류하게 되었었다. 오래전부터 김학철선생님의 아름다운 문학세계를 사랑해온 나는 바로 그때 선생님을 찿아뵐 수 있었던 것이다. 김학철 선생님은 우리 내외간을 흔쾌히 맞아주었고 나와 아내는 선생님의 신상에 대해 너무나 허물없이 이것저것 물어볼 수가 있었다. 선생님은 원산과 서울에서 지낸 소년시대, 상해와 남경에서의 생활, 신사군과 팔로군에서의 생활, 해방직후 서울에서의 생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기자생활 그리고 연변에서 겪은 고난의 생활을 두고 추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선생님의 말씀을 1매에 60분 되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두군 했다. 한 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 댁을 방문해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록하는 사이에 우리 내외간은 저도 모르게 선생님의 인간성에 더 깊이 매료되었다. 선생님께서 걸어온 길, 문학창각을 비롯한 선생님의 옹근 생애는 중국, 조선, 한국, 일본이라는 저정학절 범위를 훨씬 넘어 세계유산으로 된다고 생각한다. 굴한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 자신의 신념에 대한 충실성, 그러면서도 천진무구한 소년과도 같은 솔직함, 선생님은 한마디로 사무사(思无邪)- 거짓을 모르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第一次认识金学铁先生是在1985年,那时我和妻子在延边大学,在延吉呆了1年的时间。我对金学铁先生的文学世界已经敬仰已久了,借此机会,我去拜访了他。金学铁先生很痛快地接待了我们夫妇,我和妻子问到了先生生活的方方面面。先生回忆起他在元山和首尔的少年时代,上海和南京的生活,新四军和八路军的生活,解放后在首尔的生活,在朝鲜人民民主主义共和国的记者生活,还有在延边经历的苦难生活,随着先生一起回忆他生活的点滴。并将先生叙述的内容录制在一个时常60分钟的录音磁带里面。我们一周去一次先生的家,边听边记,逐渐陷入到先生的人格魅力之中。我觉得先生所走过的路,文学创作等人生生涯超越了中国、朝鲜、韩国、日本的地缘范围,已经成为了世界性的宝贵遗产,他不知屈服的刚正的品性,忠于自己的信仰,还有和天真无邪的少年一样的率真性格,一句话概括,先生是“思无邪”—不会说谎的实在人。

그뒤 중국에서는 물론이요, 일본과 한국에서도 선생님을 가끔 만나 뵐 수 있었다. 일본에 체류한 때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와세대대학에 오셔서 학생과 교원들 앞에서 강연을 하시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3류 여관에 이웃 방을 잡고 한 주일 동안 함께 지내기도 했다, 선생님 내외분은 국무총리 초청으로 한국에 오셨지만 국립묘지 참배도 거부했다. 선생님은 한국정부에서 신변보호(또는 신변감시)를 해주는 호화로운 호텔 투숙을 사양하고 자기 돈을 팔고 파고다공원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여관의 자그마한 방을 잡고 머물곤 했다. 우리 내외도 그 옆방을 잡고 지냈다.

后来不仅在中国,甚至在日本和韩国偶尔也能见到先生。在日本的那些日子,先生还来过我工作的早稻田大学在师生面前做讲演,我们也曾经在韩国的3流旅馆一起住过1周的时间。应国务总理的邀请,先生夫妇二人来韩国,但是拒绝参加国立墓地参拜活动。先生也拒绝了韩国政府的好意,没有住在韩国政府为了保护他人身安全(也可以说是人身监视)提供的豪华酒店,而是自己出钱,在公园后面的胡同的一家寒酸旅馆找个特别小的房间住下了。我们夫妇也住在了他的隔壁。

  나는 일본에서 선생님께서 쓰신 3편의 단편소설을 번역했다, 1991년 일인데 먼저 「담배국」을 번역하고 이어서 「이런 여자가 있었다」와 「구두의 역사」를 번역했다. 그리고 앞으로 『항전별곡』을 번역할 타산이었다. 이 작품들에 나오는 작중인물들은 가명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가르쳐준 대로 작중인물의 실명을 밝힐 생각이었다. 실명을 밝히는 쪽이 역사의 진실을 남기려는 선생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我在日本翻译了先生所著的3篇短篇小说。1991年从《烟草局》开始,尔后翻译了《居然有这样的女人》和《皮鞋的历史》,目前有翻译《抗战别曲》的打算。作品中出场的人物都使用了假名,但是按照先生的想法,我打算把人物的真实姓名公布出来,要根据先生意思还原历史真相。

앞에서 언급한 있는 녹음테이프도 조만간에 활자화시켜 세상에 내놓을 생각이다. 어언간 나도 69살이나 먹은 늙은 서생으로 되었지만 조선족문학은 나를 하루도 쉴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김학철선생님께서는 내가 죽을 때가지 나를 이끌어굴 것이다.

前面提到的录音磁带,我打算出版,公诸于众,不知不觉我也是一个69岁的老书生了。但是致力于朝鲜族文学研究,使我一天不曾休息。直到人生结束,金学铁先生都将指引着我奋斗下去。

2002년 9월 18일 점심, 연길의 한일다방에서

2002年9月18日中午,写于延吉的韩日茶馆

김학철선생님이 인생의 마지막을 스무하루의 단식으로 재촉하실 아무 연고도 모르는 오오무라 선생 부부가 찿아오셨다. 그 어떤 초인간적인 유대가 우리를 이어 놓은 것 겉았다. 오오무라선생은 김학철의 최후를 목격하고 같이 사진을 찍은 유일한 분이시다.

金学铁先生采取绝食的人生最后的21天毫无知情的大村夫妇来看望他了。好像有种无形的纽带,将我们联系在一起一样。大村夫妇亲眼目睹先生的离去,也是唯一与先生临终时合影留念的人。

김학철과 주덕해

金学铁和朱德海

  주덕해(1911-1972)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의 산파이자 초대 주장으로 서 십여 년간 연변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함으로써 200만 조선족인민의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받았었다.

朱德海(1911-1972)是延边朝鲜族自治州的创立者和首任州长,为延边州人民无私奉献十余年,受到了200万朝鲜族人民的爱戴和敬仰。

그는 일찍 10대의 젊은 나이에 북만에서 항일투쟁에 참가했고 모스크바 동방대학에 파견되어 유학하고 돌아와 연안 조선혁명 군정학교 간부,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을 지냈다. 해방 후 중국 경내 소수민족 지도자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지목 받았지만 문화대혁명 와중에 민족주의분자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갖은 수모와 박해를 받던 나머지 1972년 연변에서 수천리 떨어진 호복성 유페지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10多岁的小小年纪就参加了北满的抗日斗争,尔后被派遣到莫斯科东方大学留学,回来后成为延安朝鲜革命军政学校的干部,朝鲜义勇军第三支队政治委员。解放后,他是中国境内少数民族干部中被认为最优秀的人物,但在“文化大革命”被打成民族主义分子、叛徒,受到侮辱和迫害,1972年在与延边相隔几千里的湖北省的流放地结束了自己的生命。

청령하고 후덕하고 강직한 주덕해, 타계한 지 수십 년이 되지만 여전히 우리민족의 큰 별로 추앙받고 있다.

清正廉洁,为人忠厚的朱德海离开人世已经有数十年了,但依然是我们民族受敬仰爱戴的巨星

김학철은 주덕해보다 5살 아래다. 김학철은 될수록 권력과는 담을 쌓고 지냈고 정치가의 오만과 독선을 경계하였지만 주덕해만은 존경했고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려 했다. 김학철의 수필 『주덕해의 프로필』이 이를 잘 말해 준다.

金学铁比朱德海年纪小5岁,虽然金学铁越来越抵触权力这个东西,对政治家身上的傲慢之气表示反感,但是唯独对朱德海格外尊敬,要向他学习,这在金学铁的随笔《朱德海的简历》中很好地说明了这一点。

주덕해, 최채, 배극 등과 더불어 연변의 페터피구락부- 반동문인 김학철의 집에 모여서 술잔치를 100번 이상 벌리고 반당, 반사회주의의 음모를 꾸였다.

“朱德海、崔采、裴剧”一同在延边的Peterffy俱乐部—反动文人金学铁的家中,一起喝酒达到100次以上,共商反党、反社会阴谋。

  이것은 악몽 같던 시절에 연길시내 거리거리에 나붙었던 삐리- 활자화던 비방이다. 대단히 낯이 익은 『주덕해 죄상 120조목』 중의 한 조목이다.

这就是在那个噩梦一样的年代,在各个街道上张贴的广告—铅印字诽谤。但这也只是“朱德海120宗罪”中的一项而已。

, 최, 배는 우리 집에 모여서 장가를 둔 일은 있어도 술잔치를 벌린 일은 없다. 더구나 100번 이상이나!

朱、崔、裴虽然来过我家下象棋,但是我们根本没有一起喝过酒,更别说是100次以上了。

하긴 같은 포도주 잔쯤은 나눈 일은 있다. 그들은 다 술에 대하여 별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였다. 나는 더군다나 술이라면 질색이었다. 연변의 학원의 노박사가 별세하였을 때 주덕해 동지는 나를 보러 왔다가 ……해부를 해보니 글쎄 혈관이 모두 쇠줄처럼 빳빳하더라지 뭐야. 그 양반은 순전히 술에 녹았어.하고 마땅스레 머리를 설레설레 지었었다. 이러한 주덕해 더러 술잔치를 100번 이상이나 벌렸다니……인사불성도 유만부동이지!

不过春节的时候,我们也确实一起喝过一杯葡萄酒,他们都是对酒不太感兴趣的人。我更是厌恶喝酒,延边的卢博士葬礼的时候,朱德海来看我说,“…解剖一看,血管都像是铁丝似的,硬邦邦的,那家伙绝对是被酒水泡了”,心里不是滋味地摇了摇头。你让这样的朱德海去参加100次以上的酒宴简直是说梦话。

담배는나빼놓고- 세 사람이 다 몹시 피웠다. 셋이 다 골담배꾼이었다.

—除了我—其他三个人都很能抽。三个人都是烟鬼。

  주덕해 동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나는 감옥 안에서 신문을 통하여 알았을 뿐이다.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난생처음 그에 대하여 붓을 드는데 그 동안에 페터피구락부 성원이라던 배극 동지 또한 불뒤의 객이 되었다. 덧없는 인생이랄 밖에 없다.

朱德海离世的消息我是在监狱里通过报纸知道的。从那时到现在10年已经过去了,我第一次提笔写他的事情,期间,曾经是Peterffy俱乐部的裴剧同志也成了另一个世界的人人生不能不说是一场空。

쉬는 우리 집에 모여서 장기를 두게 되면 언제나 장기가 1대3으로 어울리는데 1은 주덕해이고 3은 최, 배, 김이었다. 『삼국연의』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3대1로 여포하고 맞붙는 형국이었다. 주덕해가 장기수가 세 사람에 비해 월등히 세기 때문이었다. 최채와 나는 멱이나 겨우 알 정도이고 배극은 제법 괜찮게 두는 축이었다. 하지만 수가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두 눈이 여섯 눈을 당해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최채와 내가 양옆에 붙어 앉아서 배극이를 자꾸 뚱겨주면 주덕해는 다급해나서 두 손을 홰홰 내흔들어 장기판을 가리며 말할 내기 없어, 말할 내기 없어!하고 우리더러 훈수를 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가도 상대편의 따먹을 때는 신이 나서

休息的时候,在我们家下象棋,方式一般是1对3,1是朱德海,3是崔、裴、金。局势堪比《三国演义》中的刘备、关羽、张飞3对1大战吕布的局势。因为朱德海的棋艺比其他3个更胜一筹,崔采和我仅仅处于初级水平,裴剧的棋艺还算不错,但是不管棋艺多么高超,两只眼睛与六只眼睛对抗还是有困难的。崔采和我坐在旁边,经常给裴剧支招。朱德海着急地手直颤抖,指着棋盘说“不能说,不能说!”不让我们掺和,不过吃对方“马”的时候,喜出望外,

식사!

“吃”

에라 하나 식사!하고 창을 지르듯이 하였다. 식사 원래 내가 발명한 말인데 다들 감염이 되어서 장기판에만 둘러앉으면 사람은 별로 신통치도 않은 식사소리를 노상 입에 담고 있었다.

“哎呀,又吃一个!”高兴地哼唱起来,“吃”原来是我发明的,后来大家被传染了,只要坐在棋盘旁边,这4个人就经常把这个不太好听的“吃”挂在嘴边。

주덕해 동지는 1서기에 주장까지 겸하여 때로는 번거로운 일도 적잖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직업작가인 나를 부러워하는 투로

朱德海同志兼任第一书记和州长,有时候,烦事缠身。他还对我这个职业作家羡慕不已。

학철이가 제일 편해! 아무 근심걱정 없이……투황디야!하고 최채를 둘러보며 웃는 일까지 있었다.

“学铁啊,你是最舒服的!没有什么担心的事儿……简直就是土皇帝啊!”回头看看崔采,笑了。

주덕해 동지가 소련에서 신강을 거쳐 연안으로 나올 동행한 이들 중에 간고한 항일전쟁 황경에서 승리에 대한 신심을 잃고 적에세 투항한 변절자 하나가 생겼었다. 태항산에서의 일이다. 변절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자도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가지고 항일부대에다 자꾸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특무를 통해 들여보냈다. 그 사연인즉

朱德海同志从苏联经由新疆去延安的时候,同行的队伍中有畏惧抗日战争的艰苦环境,丧失胜利的信心,投靠敌军的变节者。在太行山时候发生的事情。如同所有的变节者一样,那个家伙后来也成为了日本的走狗,经常通过特务向抗日部队寄送劝诱投降的信件。信件的内容大致是这样的

……그 험한 산골에서 초근목피로 겨우겨우 연명하며 무엇을 더 바라느냐? 어서어서 용단을 내려서 살기 좋은 데로 나오너라. 나오기만 하면 광명한 전도가 기다라고 있다. 운운……

“在那么凶险的山沟沟里,靠着草根树皮为生,活着还有什么意思。尽快下决心出来过好日子吧,只有出来才有光明的前途。云云......

그런데 얄궂게도 얼마 아니하여 일본군이 무조건항복을 하는 바람에 그자는 끈떨어진 뒤웅박 꼴이 되었다. 죽자가 부러진 그자를 태항산에서 나오다가 장가구에서 만났을 때, 주덕해 동지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但是饶有讽刺意味的是,不久,日本军无条件投降,他就像一个丢了筋的空葫芦一样,失去了靠山,从太行山出来,在张家口见到了他,当时朱德海同志沉浸在胜利的喜悦之中,

요놈을 붙잡기만 하면 각을 뜯어 죽이겠다!이렇게 이를 갈며 다진 맹세를 잊어버리고 자를 용서해 주었다. 후에 그자가 연변으로 찾아와서 살길을 좀 열어달라고 빌붙는 바람에 주덕해는 할 구 없이 그를 대학에 교원으로 배치해 주었었다.

曾经还咬牙切齿地发誓说“要是抓到那个家伙的话,一定给他大卸八块。”,真到了这天,却很快原谅了他。后来,他找到朱德海,跪地求饶请求能给一条生路,没有办法,朱德海给他在大学安排了一个工作。

그깟 녀석 죽거나 살거나 내버려 두잖구!

是死是活不管他好了!”

  하고 내가 마땅에 하였더니 잘못을 뉘우치구 돌아오는 자에겐 길을 열어주는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인도주의야. 당의 정책에두 부합되구. 그자가 대학에서 선생 노긋한 자격은 충분아거든. 인재지. 그런 멀쩡한 녀석이 그따위 짓을 했으니 더 기가 막하지. 저두 후희막급일 게야.

看我一脸不高兴,他说,“能给迷途知返,知错就改的人一条生路是我们共产主义者伸张人道主义的体现,也符合我们党的政策,他有在大学做老师的资格,是个人才,那样一个好端端的人能做出那样的事情,很让人生气,他也快后悔死了吧

  이렇게 말하고 주덕해 동지는 마디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他说完后,朱德海同志又补充了一句。

정치를 하자면 아량으루 너그럽게 받아들일 줄두 알아야 . 그저 두들겨 패는 것만이 장단은 아니거든.

“搞政治的人要有雅量,要懂得宽容,只是打击批评不是个好办法”

  그가 이런 관후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었던들 연변인민들 속에서 그와 같이 높은 신망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타고난 천성이지 수양의 힘인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장자의 풍도가 있는 정치가였다.

他如果没有这么宽广的心胸的话,在延边人民的心中就不会有这么高的威望,不知道是天性还是修养的力量,他政治家的气质里有一种长者的风度。

  내가 농촌에 생활체험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농민의 집에서 무슨 제사를 지내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일은 안 하고 그 집에 모여서 북적북적하는 중에 당지부서기란 사람까지 한 몫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대단히 못 마땅하게 여겼다. (들일이 바쁜 때 저게 뭐람!)

这是我去农村体验生活的经历,一个农民的家里正在举行祭祀活动,结果全村的人都不干活了,都挤在他们家,就连党支部书记也去凑热闹,当时我心里觉得很不舒服。(农活都这么忙,做这个干什么。)

  이튼날 나는 전위해 돌아와서 주덕해 동지에게 사실을 반영하였다.

第二天,我从前方回来,向朱德海反映了这件事情。

일들은 안하구……대낮에……그게 뭡니까? 더구나 군중의 선봉에 서야 할 당지부서기란 게!

“不干活……大白天的……,那是干嘛呢?更可况党支部书记可是群众的先锋啊!”

  나의 말을 듣고 주덕해 동지는 빙긋이 웃고 타이르듯 말하는 것이었다.

听完我的话,朱德海同志微微一笑,对我训话。

지금 농민들이 배에 기름기가 부족하단 말이요. 무어 먹는 게 있어야지. 그러니 무슨 잔치나 제사 같은 때 겸사겸사 한 번 모여서들 먹는 거지…… 먹어진 않구 자꾸 일만 하랄 수는 없거든.

“现在农民饥寒交迫的,总得有点儿吃的,所以说有喜事儿或者祭祀的场合,他们去祝贺,顺便吃点……不吃饭也干不了活儿啊”

  나도 머리가 아주 깡통은 아니나까 말의 뜻을 근량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인제 잘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더니 그는 진일보 나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我的脑袋也不笨,了解了他的意思,点点头,表示懂了,他又进一步开导我。

지금 농촌에서 사사로이 술을 벚어먹는 법으루 금하지만…… 그것두 너무 융통성 없이 금할 수는 없단 말이요. 농촌 늙은이들이 막걸리 동이나 담가놓구 컬컬할 때 한 북주깨 떠내다가 부저가락으로 화릇불을 헤집구 데위 먹는 걸 이렇게 말리우? 그 재미루들 사는데! 그런 건 다 어물어물 눈감아줘야 하오. 일반 백성은……배를 곯리면……애국두 없거든. 그러니 그들의 어려운 형편을 잘 살펴보구나서 글을 쓰두룩!

“虽然现在农村在法规上禁止私下里酿酒喝……但这规矩没有灵活性,也是禁止不了的事情”。农村的老爷子们把米酒装满一大桶,舀出一瓢,用火筷子拨弄火炉,在上面加热着喝,看到这个情景你怎么去阻止,这是人家的乐趣啊,遇到这些事情你都要帮助搪塞过去,睁一只眼闭一只眼。对于一般老百姓来说……如果饿了肚子……也就谈不上爱国了,所以你要好好观察他们的困难现实,写在文章里面。

  당시 이렇게 나를 타일려주던 주덕해 형상은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눈앞에 켜져만 간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좀처럼 드놀지 않는 무게 있는 볼셰키였다.

当时,朱德海就是这样劝诫的我,随着时间得流逝,朱德海在我心目中的形象日益高大,他无论在任何环境下,都一如既往的冷静沉着,俨然一个布尔什维克的化身。

  또한 김해양은 필자(김호웅)에게 어릴 적 주덕해의 딸 양채, 아들 양일이와 함께 찍은 로맨틱한 사진을 보여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还有,金海洋给笔者(金虎雄)看了小的时候和朱德海的女儿英彩、儿子杨一一起照的很浪漫的照片,就有了下面的故事。

주덕해와 우리 집은 수많은 정치풍파 속에서도 시종 의좋게 지냈다. 여기에 숨은 인연은 나의 고모부 왕련 장군(즉 김학철의 매부로 북조선공군의 초대 사령원)이 모스크바 유학시절 주덕해와 친구사이였고 연안으로도 같이 나온 전우였다.

“朱德海和我们两家虽然经历了很多政治风波,但是一直相处融洽。这其中一部分原因是由于我的姑父王连将军在莫斯科留学的时候和朱德海是朋友,在延安的时候是一起战斗的战友。

반우파운동 후의 3년 기아년대에도 남들이 우파가정으로 등 돌릴 때 주덕해는 밤에 통신원을 시켜 자기 집에 배당된 배추 등 생필품을 우리 집에 보내주시군 했다.

在反右派斗争结束后的3年,进入了饥荒年代,其他人因为右派家庭纷纷与我家断绝往来时,朱德海在这种情况下,连夜派通信员到我们家送白菜和生活用品。

내가 초중진학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임에도 우파아들이라고 2류 학교에 배정된 사실은 안 주덕해는 당장 초생위원회 주임을 우리 집으로 보내 내가 가고 싶은 학교를 선택하게 하셨다.

虽然当时我在朝中入学考试中取得了优异的成绩,但是他们认为我是右派的儿子,把我安排到2流的学校,知道这件事情之后,朱德海马上让招生委员会主任去我家,让我随意挑选自己愿意去的学校

주덕해가 우리 집으로 장기 두러 오시면 나는 역으로 그의 집에 가서 영채, 양일이와 같이 있었으면 문화대혁명중 중덕해가 폭도들을 피해 숨어 다니실 때 그들 또한 우리 집에 와서 답답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동병상련이였던가?

朱德海要是来我家下棋的话,我就去他们家和英彩,杨一一起玩,文化大革命中,为了躲避暴徒,到处藏身的时候,他还来到我们家倾诉内心之苦。这也可能叫做同病相怜吧。

  주덕해의 본명은 오기섭, 그 역시 항일전쟁 당시 홍성걸이 김학철로 변신할 때 주덕해로 된 것이다.

朱德海的本名叫做吴基燮,当时应该是金学铁在抗日战争时更改本名洪性杰的时候,改名为朱德海。

27. 서울 나들이

27. 首尔行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 월북문인들에 대한 해금조치를 취함에 따라 김학철의 작품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89년 4월 김학철의 장편소설 『격정시대』(상, 중, 하)와 『해란강아 말하라』(상, 하)가 한국 풀빛사의 의해 재판이 되고 1989년 5월에는 실화 『고봉기유서』가 마천사에서, 1989년 12월에는 작품집 『무명소졸』이 풀빛사에서, 같은 해 수필집 『태항산록』이 대륙연구소에서 출판됐다. 1989년 9월 김학철은 43년 만에 고국을 다시 찾았다.

20世纪80年代后期,韩国对脱北文人实施解禁,金学铁的作品也开始受到注目1988年4月金学铁的长篇小说《激情时代》(上、中、下)还有《说吧,海兰江》(上、下)在韩国的草绿社重新出版,1989年5月,报告文学《高峰起遗书》在马天社出版,1989年12月作品集《无名小卒》在草绿社出版,同年,随笔集《太行山录》在大陆研究所出版,1989年9月,金学铁43年后重新回到故国

옛집

老房子

  43년 만에 서울에 온 김학철 내외는 거리거리가 놀랄 만큼 변한 데에 어리벙벙해졌다. 난생처음으로 자동판매기라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다가 동전을 밀어 넣으면 따끈따끈한 커피가 저절로 나오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는가 하면 또 라면이 제창 (먹기에 알맞게) 컵에 들어있고 해서 이들 내외는 감탄하다 못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유까지 갑 속에 넣어서 판다는 것을 알고는 우리 이거 마법의 세계를 유람하고 있잖아? 의심이 지경이었다. 천지개벽 이래 우유는 으레 병속에 들어있기 마련이라는 관념이 무너지는 마당이었다.

到首尔的金学铁夫妇,被这个城市各个街道的变化惊呆了,第一次看到自动贩卖机,只要把硬币推进去,一杯温热的咖啡就自动出来了,还有随时可以吃到的纸杯里的方便面,看到这个场面的金学铁夫妇对视着,惊讶不已。就连牛奶都装到盒子里面销售了,他甚至都怀疑“我们是不是游览在魔法的世界?”瞬间打破了开天辟地以来,牛奶从来都是装在瓶子里的观念。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김학철 내외는 어떤 분의 아파트에 기본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청해 들이는 객실에 멋도 모르고 들어서다가 김학철은 새삼스레 자기 몸에서 촌티가 지르르 흐름을 느꼈다. 으리으리한 옥루금궐이 어떻더냐 글귀가 떠올라서 몸가짐이 어줍어졌다. 그런데다가 또 불을 끄고 시원하게 트인 창문으로 내다보는 밤 한강의 야경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옥루금궐 서울서는 중류층을 벗어난 것이란다. 그러니 상류층의 자택은 어떠하리라는 것을 가히 짐직할 수 있었다.

在首尔居住的那段时间,金学铁夫妇还去过一个人的家里。乘坐电梯,迷迷糊糊地被请到客厅里面,突然被眼前的景象触动了,重新感觉到自己身上散发的浓重的土包子气。不禁想到了这样一句话,富丽堂皇玉楼金阙”,在这种地方住着,多少有些笨手笨脚的,关上了灯,从窗外望去,汉江的夜景一览无余,那一刻让人真正感觉到了生活的意义。但是后来他才知道,玉楼金阙”也不过是首尔这个城市中流层偏上的程度而已。以此可以想象到上流层的生活多么华丽

형편이 이렇건만 편으로는 구태여 달동네나 난지도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다른 극을 보아내기는 어렵지 않은 서울이었다. 김학철 내외가 여인숙을 집은 낙원상가 뒷골목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는 조선 기와집들을 용케 아직도 남아있다 감탄하면서 둘러보다가 김학철은 어느 열려 있는 대문으로 무심코 안을 엿보았다. 그전 격식대로 한다면 대문간 옆에 행랑방이 되겠는데 그 방문쪽마루 양쪽에는 드나드는 길만 터놓고 살림 제구들이 포갬포갬 덧놓였었다. 그리고 쪽마루 밑에는 크고 작은 신발들이 네댓 켤레 어지러이 벗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그 됫박만한 단칸방에서 현재 네댓 식구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후에 듣자니 비닐로 지은 가건물에서 살면서도 철거령이 내릴까봐 전전긍긍하는 가정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但是另一方面,不用非要去贫民窟或者兰芝岛去看,在首尔不难看到另一番景象。在金学铁夫妇住的旅店后面的胡同里,直到现在还保存着朝鲜的瓦房,他感叹着说:“还是设法保存了下来啊”,环顾四周,无意地往一个敞开的大门那边望去。如果说按照以前的布置来说的话,大门旁边应该有个耳房,房门窄檐廊两侧有条供出入的路,生活用具层层叠叠地放在那里,在窄檐廊下面凌乱地摆放着四五双大大小小的鞋子,也就是说在这个不大点儿的单间房里面目前住着四五口人。后来得知,就算是住在临时建筑里面,说不定哪里一天会下迁居令,有很多家庭还依然过着担心受怕的日子。

이러하기에 후일 김학철은 서울 어느 신문사 기자의 인터뷰를 받을 아름다운 서울을 천당과 지옥이 동거하는 이라 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이쯤 되면 사회적인 동란은 으레 일어나기 마련이다. 불 위에 올려놓은 물이 끓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할 노릇이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所以后来,金学铁接受首尔某新闻社的采访时,把首尔形容为“天堂与地狱同住”的地方, ,他批判说“如果贫富差距过大的话,会引起社会动乱,想让火上的水不沸腾是多么愚蠢的想法”。

김학철은 뭐니뭐니 해도 60년 전에 살던 옛집을 한 번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놀라운 만큼 변모한 서울의 거리거리를 둘러볼 때, 관훈동 69번지 옛집이 그대로 남아 있어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한낱 꿈만 같았다.

金学铁还是最想找到60年前曾经居住过的房子,心情极为恳切。但是首尔变化是这样大,大街小巷都找遍了,也找不到贯勋洞69号,曾经构想着这个老房子能够留下来,也不过一场梦而已。

그래도 종시 미련을 떨쳐버릴 없어서 검불밭에 수은 찾기로 나서 보았다. 허허실실로 안국동 네거리에서 인사동을 행하고 걸으면서 왼손 편 골목을 하나하나 세어나갔다. 세 번째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다가 왼손 편으로 두 번째 집. 놀랍게도 나지막한 한옥이 그대로 남아있잖은가! 전날의 대문간과 행랑방은 할머니집이라는 음식짐으로 변했고 사랑채는 무어라나 하는 간판집으로 변했지만은 한눈에 알아볼 있는 옛집이었다.

但无论如何,他都放不下内心的执念,就算是怎么找也找不到,也打算再试一次。似是非是地从安国洞十字路口出发,朝仁寺洞的方向走去,挨个数着左手边的胡同,从第三个胡同往里面拐,左手边的第二户居然是一个低矮的韩式小屋,被保存了下来,曾经的大门口和耳房如今变成了“外婆家”的餐饮店,厢房变成了一个某某招牌店,但还是能一眼认出来,这就是曾经的那个老房子。

김학철은 오랜 세월 실전됐던 족보라도 찾아낸 같아 대견해서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간판점의 열려 있는 가게문 안에다 고개를 디밀었다.

金学铁像是找到了失传已久的族谱一样,非常激动,心跳加速,他来到招牌店,向里面探探头问道:

여기가 혹시 관훈동 69번지가 아닌가요?

“这里不是贯勋洞69号吗?”

. 맞습니다. 69번지. 대답하며 주인은 김학철의 내의를 묻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对啊,这里是69号”主人答复着,似乎要问金学铁的来意,一直注视着他。

아니 …… 실은 무슨 볼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저 이집이 옛날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오륙십 년 전에…… 우리가 살던 집이였죠. 그래 그저 괜히…… 지나던 걸음이라 한 번 둘러본 거예요. 딴 일은 없습니다.

“不……我不是有事找你们……我家以前…… 也就是从现在算起五六十年前…… 这里是我们曾经住过的房子,所以只是……刚好路过就过来看看,没有别的事情”

변명하듯 말하고 김학철은 총총히 발길을 돌렸다.

像是在辩解一样,金学铁匆匆离开了。

중국 당나라 시인 하지장은 벼슬을 살다가 50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니 동네아이들이 몰라보고 어디서 오는 손님이냐 묻는 바람에 감구지회가 한층 깊었다는 시를 있다. 그 시의 현대판 시경 속에 잠긴 채 김학철은 터덜터덜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中国唐朝诗人贺知章在外做官,50年后回到家乡,村里的小孩子都不认识他,问道“这是哪里来的客人啊”贺知章听到后无比感怀,作诗一首。金学铁沉浸在那首现代版诗境中一步一步回到宿舍。

그때 김학철 내외가 여인속 옆방에 일부러 찾아온 일본 와세다대학교 오오무라 교수 부부도 투숙하고 있었다. 김학철의 옛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니까 오오무라 교수는 크게 흥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那时,早稻田大学的大村教授夫妇就住在金学铁夫妇所住的旅店隔壁,金学铁说了他老房子的故事,村上夫妇很感兴趣的样子。

내일 같이 가보십시다. 시진을 좀 찍어야 하겠습니다.

“明天我们一起去看看吧,应该照照相”。

이튿날 사람이 할머니집 식사를 하면서 여주인에게 연유를 설명하고 안채를 구경해두 좋으냐니까 어서 그러세요.라는 마디로 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第二天两对夫妇一共四个人前往“外婆家”去吃饭,他向女主人说明了缘由,询问“能否看看后屋”,女主人回答“可以,快请进”。很爽快地答应了。

안에를 들어가보니 놀립게도 60년 전의 옛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잖은가. 오오무라 부인은 속사포식으로 신바람이 나게 셔터를 눌러댔다. 여기까지는 아주 만점이었다. 그런데 일단 안에서 나오자 인사동에서도 유명한 고가라 외국인에게는 관람료를 받는다 했다. 옛 주인이 60년 만에 왔는데 일본말을 하는 외국손님 대접으로 바가지요금을 씌우는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할래도 낙제점이었다.

进去一看,居然和60年前几乎是一模一样,大村的夫人很兴奋,速射炮式地按下了快门,到这里为止很完美,可是从里面出来的时候,主人说“仁寺洞这里也算是有名的古建筑了,对外国人是要收观光费的”,60年前这个房子的主人来了,居然以“说日语的外国客人”的待遇招待,还出这么坑人的价格,不管怎么想都觉得不可思议,印象很不好。

관료비가 너무 비싸군!

“观光费实在是太贵了”

김학철네 사람은 여주인이 알아들을까 일본말로 이렇게 말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金学铁4人怕女主人听出来,故意用日语这样说,大家都笑了。

밖에 나오자 김학철은 출입문에서 엇비슥이 떨어진 길바닥을 가라키면서 여기가 바로 방학 때마다 내가 나와 서서 우편배달을 기다리던 곳이지요.하고 거두절미하고 안내를 하니까 오오무라 교수는 귀가 솔깃해졌다.

出来后,金学铁指着离大门稍稍偏的那条路面说:“这就是我每每放假的时候,出来等邮件的地方。”他简要地介绍一下而大村教授对此破感兴趣

우편배달을 왜요?

   “为什么要等邮件?”

까닭이 있었죠.하고 잇달아서 김학철이 휘황찬란한 통신부를 죽어도 어른들의 눈에 띄게 없어서 통신부가 배달될 무렵이면 미리 나와 물샐틈없ㅇ 경비전을 쳤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오오무라 교수 내외는 보초 서던 유적 서서 허리를 잡고 웃었다.

“这是有原因的。”紧接着金学铁说,那时,死也不能让那个对他来说辉煌灿烂的邮件被大人们发现,所以,邮件被寄到时,他提前出来,拉开警备战,听到这儿,村上夫妇“哨兵站过的遗迹”上笑得直不起腰来。

오성장 여인속

五星级宾馆

1994년 3월 김학철은 한국 KBS해외동포상(특별상)을 수상하는데 그 수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부부동반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1994年3月,金学铁获得了KBS海外同胞奖(特别奖),为了参加颁奖典礼,金学铁夫妇一同重新踏上了故土

헌데 KBS에서 예약해놓은 호텔은 숙박료가 놀랍게도 일박에 400달러였다. 침실과 객실이 따로따로인데다가 전화기가 모두 네 대. 텔레비전이 또 두 대였다. 그야말로 김학철의 말 그대로 촌닭이 관청에 들어선 이었다.

KBS为其预订的酒店是一天400美元,卧室和客厅是分开的,一共4部电话,电视一共2台,用金学铁的话说,那可真是“村里的小鸡进了衙门”。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좌변기였다. 대관절 어떻게 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항공기의 조정석을 방불케 하는 기계들이 수두룩이 달려 있는데 암만 연구를 해봐야 그놈의 용법을 깨칠 재간이라곤 없었다.

最让人头疼的是坐便器,他不知道这个东西到底应该怎么使用,如同飞机上调整座位的设备都一应俱全,但是无论怎么研究,都搞不懂它的用法。

식사도 문젯거리였다. 호텔 1층과 지하층 그리고 4층과 12층에 각각 한식점, 일식점, 양식점이 있는데 김학철 내외는 그 중 어디를 가서도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계산서에다 김학철이라고 이름 자만 사인은 해주면 그만이었다. 김학철은 칠십 평생을 살면서도 이런 기 막히는 상팔자를 누려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메뉴라는 것을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체면상 웨이터더러 우리는 먹어야 좋으냐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가까스로 풋면목이나 아는 요리 하나를 짚어서 당장 망신은 모면했으나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던 것이다. 끼니마다 외마디 장단으로 똑 같은 것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吃饭也是问题,酒店的1层和地下,还有4层和12层各有韩式餐厅、日式餐厅、西式餐厅,金学铁夫妇如果想吃哪家,只要在结算单上签字“金学铁”即可。对于金学铁来说,70年的人生生涯中,第一次享受到这种令人有些窒息的优越生活。可是菜单又是一个问题,不论怎么看都不知道什么是什么。但是又不能直接叫服务员,亲自问他“我们应该吃什么比较好?”快绝望的时候,好不容易发现了一个貌似吃过的菜点了一下,才避免了一场尴尬,但是问题又出现了,因为每一餐都要吃同样的食谱。

사서 하는 고생이 자꾸 겹치니까 무던하기로 소문난 부인이었지만 자연 남편을 보고 푸념을 하게 됐다.

因为每一顿饭顿顿如此,老实的妻子开始埋怨丈夫了。

100달러짜리 일반실에다 들여 주고 나머지는 돈으로 줬으면 좀 좋아. 식대를 내주고 맘대로 나가 사먹으라면 될 걸 가지고. 그러면 10분의 1도 안 들것 아냐.

“花100美元订一间普通房,剩下的钱分给本人就好了。如果发给伙食费让我们去外头随便买饭吃,那么钱都用不了十分之一。

그러니까 나머지 10분의 9는 현금으로 챙기겠다는 것이다. 김학철은 50년을 같이 살면서도 집사람이 이 정도로까지 고명하신 실용주의적 경제학자인 줄은 미쳐 몰랐던 터라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술회하고 있다.

也就是说剩下的十分之九换成现金,金学铁坦言说“一起生活了近50年,我万万没想到妻子居然是这么高明、这么会过日子的经济学者”,惊讶了好一阵子。

김학철은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파고다공원 뒷골목에 있는 오성장이라는 여인숙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자리는 비줍았지만 종로거리에 있어 교통이 편리했고 쌍지팡이를 짚고 잠간 소퐁 삼아 걸어 나가면 파고다공원 옆 골목에서 설렁탕도 먹을 수 있었다. 그 육개장은 그때가지 먹어본 무슨 호텔의 뷔페, 무슨 하우스의 정식, 무슨 관의 뭐라는 요리들이 다 무색할 지경으로 맛이 있었다. 김학철 내외의 식성에 꼭 들어맞는 절품이었다. 하긴 값도 굉장히 싸서 좋았다.

金学铁到处打听,在宝塔公园后面的胡同里有个叫吴成章(音)的旅馆,他们搬到了那里,虽然房间并不宽敞,但是位于钟路街道,交通便利,拄着双拐,出去散散步,还可以到宝塔公园旁边的胡同喝上牛杂碎汤,那个香辣牛肉汤是目前为止任何饭店的自助餐厅,什么小店里的套餐,或者是什么餐馆的什么菜都无法与之比较的,特别好吃,特别符合金学铁夫妇的口味,堪称绝品。而且最主要是价格相当便宜。

파고다공원 뒷골목에 있는 여인속은 김학철 내외간이 목으면서 뜻밖에 한국의 유명한 문인, 교수들이 드나들게 되었다. 한번은 공식행사가 끝나고 다시 이곳 오성장이란 단골 여인숙으로 자리를 옮기였는데 난데없이 조정래의 전화가 왔다. 깜짝 놀란 김학철이 아니 어찌 우리를 찾아낸 거냐? 의아해 하니 조정래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선생님이 공식장소에서 사라졌으니 그곳밖에 가실 곳이 있겠습니까?하는 것이었다.

金学铁夫妇居住的位于宝塔公园后面胡同的酒店,让人感到意外的是有很多韩国有名的文人,教授出入。有一次,金学铁参加完一场公开活动,正往这个他经常光顾的叫吴成章的小旅馆走,突然接到了赵正来的电话,有点惊慌的金学铁问“你是怎么把我们找出来的啊?”赵正来诡异地笑着说:“老师从公开活动上消失了,不去那儿还能去哪里啊?”

원광대학교 김재용 교수도 바로 여인속에서 김학철 선생을 모시고 나오다가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두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했다. 김재용 교수가 소심스레 김학철 선생을 보고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셨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그이께서 한 마디 하시기를

圆光大学的金载勇(音)教授就是在这家旅馆看望金学铁后出来时,把金学铁的话奉为自己的座右铭。金载勇教授小心翼翼地端详着金学铁先生说到您的人生是波澜壮阔的人生,还克服了人生许多逆境走过来的。这时金学铁总结出这样一句话:

역사는 인간이 해낼 있는 과제만을 주는 거야.

“历史留给人类的,总是可以解决的课题。

신경림은 당시 김학철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申景林(音)谈对金学铁的印象时是这样说的:

김학철 선생이 서울에 오신지 두어 달이 되었다고 들었지만 아직 나는 뵙지를 못하다가 며칠 조정래의 『태백산맥』출판기념회 자리에서 먼발치로 뵈었는데, 축사를 하는 그의 모습과 목소리가 너무 젊고 당당한데 적이 몰랐다. 그는 문학은 사람이 고루 편하게 사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라고 피력하면서, 한국에는 잘 사는 사람의 노리개로 되려는 문학이 적지 않은데 놀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편 서울에 와보고 잘 사는데 기뻤지만 빈부 격차가 너무 심한데 놀랐으며 변혁이 불가피함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이 변혁은 누가 주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싸움으로 빼앗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가장 힘이 들어있었다.……한 마디로 그의 첫 인상은 소설가라기보다 역시 한 전사라는 느낌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래서 온갖 삶의 지혜를 다 갖춘 늙은 전사라는. 그의 소설의 편함, 넉넉함은 어쩌면 여기서 오는 것이 아닐까.

“虽然我听说金学铁先生说来首尔已经两个多月了,但是我一直都没有见过他,后来在赵正来的《太白山脉》出版纪念会上,从远处看到了他。发表祝词的他声音居然是这样年轻有活力,又如此威仪堂堂,他阐述了文学应该为了人民能过上舒服的生活,创造一个美好的世界而做出贡献。他也直言不讳地指出,韩国有很多“御用”文学,, 文学成少数富人的玩偶。来到首尔后,很为首尔的幸福生活感到欣慰,但贫富差距之大,让他意识到变革不可避免。这一场变革不是哪个人来施予的,而是通过战斗争取来的,说到这里,他的声音变得格外有力量。……用一句话说就是比起小说家,他更给人一种战士的感觉。经历了饱经风霜,拥有生活方方面面的智慧的老战士,他小说的独特魅力,既舒服,又充实的感觉是不是源于此呢?

조정래도 그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赵正来是这样描述他对金学铁的印象的。

그때 한국에 오셔서 한국문단과 한국사회에 충격을 것이 가지라고 있는데 번째가 한국인 지식인으로서 특히 작가로서 독립투쟁을 하고 때문에 다리가 없는 불구의 몸으로 나타났다. 남쪽에서는 없었던 전히 없었던 일이지요. 만주라는 갈 수 없었던, 전설로만 남아있는 그 땅에서 문인 한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독립투사다. 독랍투사의 흔적으로 한쪽 다리가 없이 외다리로 왔다 하는 것이 엄청난 충격을 가했어요. 독립투사로서 거의 다 남쪽에서는 돌아가셨거나 존재가 희미해져있었는데 살아있는 실체가 나타난 거예요. 그것이 우리 지식인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그분이 더군다나 소설가다 하는 것이 모든 매스컴, 신문방송, 잡지가 다 주시해야 될 인물로 받아들이도록 그렇게 했어요. 독립투쟁이라 하는 것이 이미 전설이거나 설화로 되여 버렸는데, 살아있는 생생한 증인이 나타났다. 또 그분이 만주에서 왔다. 소설가다 이런 것이 중첩되어서 매스컵 언론의 중심적 화제인물로 될 수밖에 없었지요.

那个时候,来到韩国,对韩国的文坛和韩国的社会有重大影响的可以说有两件事情,第一件事情是作为韩国的知识分子,特别是身为一名作家,参加独立斗争,也因此失去了一条腿,以不完整的身躯出现在大家的面前,这在韩国绝对是绝无仅有的事情。没有去过的满洲国,只是像传说一样存在的土地上,来了一位文人,那位文人就是独立斗士。他身上有独立斗士的痕迹,缺失了一条腿,仅用另一条腿走路,这的确给我很大的精神冲击。如果说是独立斗士的话,在南边基本上都已经去世了,生存的情况很渺茫,他居然活着出现了。这确实让我们这些知识分子们惊讶不已,还有,他甚至以小说家的身份出现,受到媒体,新闻广播,杂志热烈关注,独立斗争如今看来应该是传说或者是停留在故事里,但是活生生的证人却出现了,而且还是从满洲来的,加之还是小说家,这样的多重身份无疑会成为舆论媒体的中心话题人物。

그리고 번째가 조선의용군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학을 연구하는 극소수의 학자들에 의해서 그런 것이 있었다 하는 것이고 남쪽에서는 그야말로 전선적인 것이었지요. 실제로 독립투쟁을 해서 산 사람은 사회상에서 한명도 없었으니까. 대개로 상해임시정부, 김구를 중심으로 한 상해임시정부 그 정도는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조선의용군이라고 하는 것이 중국 홍군과 함께 투쟁했던 그 실체가 또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그분 소설이, 『격정시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의 생생한 투쟁기를 역사계 쪽에다 그 실체를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역사계가 굉장히 놀라고 조선의용군이 전설적으로 한 줄 정도로 언급될 수 있는 것을 수십 페이지에 걸쳐서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직접 제공한 것, 이것이 그분이 우리 만족역사에 세운 큰 공이지요.

第二件事是作为朝鲜义勇军的身份出现,对研究历史学的极少数学者来说有着重要的价值,在韩国,可以说是一个传奇,实际上他们认为参加独立运动的人已经没有一个人活在这个社会上了,了解的也只局限在上海临时政府,或者是以金九领导的上海临时政府。但是中国红军一起并肩战斗过的朝鲜义勇军真实人物出现了,他的小说《激情时代》正是将朝鲜义勇军斗争的那段历史记录下来,贡献给了历史学界,还原历史真相。因此,当时轰动了历史学界,对朝鲜义勇军的介绍原本可以一笔带过的,他足足写了数十页文字,提供了宝贵的历史材料。可以说金学铁先生对我们民族的历史有着不可磨灭的功绩。

보성중학교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혁혁한 투쟁을 독립투사가 나타남으로써 학교의 명예가 되였어요. 동창회에서도 깜짝 놀라서 환대를 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분께서 다리 불구의 몸을 이끌고 소설을 줄기차게 썼다는 것이 이쪽 작가들에게, 문단의 지식인들에게 시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분이 보여준 꿋꿋한 정신이 강하게 이미지를 주어서 이쪽의 나태하거나 또는 소시민적으로 변해있는 작가들에게 지식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셨어요.

对于宝城中学来说,学子中居然出现了这样一位参加过伟大抗日战争的民族独立斗士,也为学校增光添彩。在同学会上也让大家感到十分惊讶,甚至还受到过热情的款待。他拖着不健全的身体,坚持写小说,这种精神也让韩国的作家、文坛的知识分子们为之叹服,给他们一种新的精神冲击,他身上所体现的刚正不阿的精神境界是那些变得懒惰并趋向小市民化的作家学者们应该学习的典范。

더욱이 그분께서 단순히 지난 세월이 항일투쟁을 것뿐만 아니라 다시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모순에 대해서, 의미지에 대해서 직접 지적하고 그것 때문에 10년 감옥살이를 했다는 그 투쟁의 정신, 사회주의가 아상으로서만 아니고 현실로 됨으로써 산생한 많은 문제점, 그러한 모순에 직접 저항하고 진실을 규명하고 올바른 사회주의로 강하게 존재하기를 바랐던 그 순결성, 그런 것들이 그분에게 10년 감옥살이를 하게 했다는 것, 만기출감 후 중국정부에서 무죄로 재 판결, 수많은 고난을 이기고 계속해서 작품을 쓰고 있다는 것, 그때만 해도 중국과 수교가 되지 않은 상태에 사회주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던 남쪽사람들에게 그런 강건한 모습을 보인 것, 이것이 바로 지긴인로서, 작가로서 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신 것이지요.

再者,他不仅仅参加了曾经的抗日斗争,还针对中国社会主义的矛盾和阴暗面进行了批评,因此,坐了10年的大牢。他有着强烈的斗争精神,努力将社会主义构想转化为现实,直面抨击社会矛盾,理清真相,力图建设真正的社会主义,他的思想是一尘不染的, 但是却承受了10年的监狱生活,刑满出狱后中国政府对他宣布无罪判决,他又克服重重困难,继续坚持文学创作,当时,中韩尚未建交,大家对社会主义还一无所知,今天他以如此刚健的形象出现在大家面前,正是向大家展示作为一名知识分子和作家是如何在这个时代熬过所有的岁月的。

남색 중산복

蓝色中山装

중산복은 중국의 엘리트들이 입는 정장인데 호주머니 개가 밖에 달려 있고 아래로부터 여러 개의 단추는 몰론 목깃 단추까지 단정하게 dual는 것이 특정이다. 손중산, 장개석, 모택동 등 20세기 중국의 지도자들이 모두 중산복을 즐겨 입었고 태항산지역에서 싸웠던 조선의용군도 대체로 중산복 모양의 군복을 착용했다. 1938년 10월 무한 조선의용대 발대식의 대부분 군인들이 입은 것 역시 중산복 모양의 군복이었다.

中山装是中国的精英们一般穿的正装。在中山服的外面有4个衣服兜,从下到上有几个纽扣,就连衣领上的纽扣都很别致,这是中山装的一大特征。如孙中山、蒋介石、毛泽东等中国20世纪的领导人都很喜欢穿中山装。在太行山地区战斗过的朝鲜义勇军大体上也愿意穿中山服模样的军装。1938年10月,武汉朝鲜义勇军建队仪式上,大部分军人穿的都是中山装一样款式的军装。

김학철은 평생 중산복을 애용했다. 새벽 운동하러 나가면서 입는 옷도 중산복이요, 가끔 회의에 나갈 때 입는 옷 역시 중산복이다. 그나마 단 두벌밖에 없는 중산복인데 아침운동을 할 때 입고 나가는 중산복은 두 겨드랑이가 쌍지팡이에 마손되어 마치 잔구멍이 숭숭 뚫린 떡보 같이 돼버렸다. 물론 회의에 나가실 때나 출국을 할 때는 산뜻한 남색 중산복으로 갈아입었다.

金学铁一辈子都很爱穿中山装。清晨出去运动的时候,穿的衣服都是中山装,偶尔开会的时候,穿的衣服也是中山装。只有这两套,早上运动的时候也穿的那套,腋下的部位被拄的拐杖磨损了,都被穿孔了,都是一个又一个的窟窿眼,当然了,开会的时候,或者出国的时候,换上另一套干净的蓝色中山服。

  한데  남색 중산복이 서울에서 시빗거리를 불러  줄아야!

但万万没想到的是,这套蓝色的中山服竟然能引起争议。

  KBS해외동포상 시상식에 참가하기 이틀  일인데 사무국장이 호텔까지 찾아았다. 김포공항에서 마중할 때부터 보아오니 양복도 아니요, 한복과는 10 8천리나 거리가 있는 이상한 옷을 입었기에 KBS당국과 논의한 끝에 양복   선물하기로  것이다.

参加KBS海外同胞奖颁奖仪式的前两天,事务局长来到金学铁所在的酒店, 金浦机场看到他穿的那件衣服,既不是西装,和韩服的样式又相差十万八千里,不伦不类,经过同KBS当局商议,决定送金学铁一套西装作为礼物。

  “선생님께 이번에 벗진 양복  벌을 맞취드리기로 했습니다.

先生,为您准备了一套帅气的西服。

  “그건   합니까?

    “送这个干什么?”

  “아 시상식  입고 무대에 오르셔야지요.

    “在颁奖典礼登台的时候穿。

  다른 분이라면 이게  떡이냐 하고 감지덕지 받아들였겠지만 김학철은 오히려 “고맙지만 그만두십시오.

如果换成别人,会以为天上掉馅饼了,感恩戴德,可是金学铁却说“谢谢你的好意,但还是免了吧

  “아닙니다. 지금 입으신  (중산복)으로는  곤난하거든요.

    “别,别,现在您穿的这身(中山装)有点不合适”

  “그건  왜요?

    “这是为什么?” 

  “정국에다 생방송을 하는데……  옷에선 모택동, 김일성의 이미지가 풍기거든요.

    “这个节目全国直播……这件衣服有种毛泽东、金日成意象的味道

  김학철은 어이가 없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동안 각자의 주장을 내세웠으나 종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金学铁听完这话,哭笑不得,和他争论不休。僵持了一阵,谁都不放弃各自的主张,始终不能达成一致。

  “좋습니다. 그럼  시상식에 불참하겠습니다.  입는 것까지 구속을 받고서야 어떻게……”

“好,那我就不参加颁奖仪式了,连穿衣服都被拘束,还参加干什么……”

  그제야 사무국장은 밥을 먹다 돌을 씹은 얼굴이 돼가지고 돌아갔고 결국 김학철은 중산복차림으로 해외동포상시상식 무대에 올라갔다.

这样一来,事务局长的脸顿时变得僵硬,默默离开了。最后金学铁穿着中山装站在海外同胞奖颁奖典礼的舞台。

  그가 중산복을 고집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김학철선생님께서 타계 하셨을  마지막으로 중산복을 입혀드린 서예가이며 수필가인 단천 김호근씨가 아야기 한다.

他坚持穿中山装是有理由的,在金学铁离世的时候,一直在陪伴在身边,最后给他穿上中山装的书法家兼散文家金浩根(音)先生这样说。

“선생님, 선생님을  가까인 모신  20 성상 저에게는 풀지 못한 수수게끼가 있었습니다.

“老师,陪伴在老师身边20的时间,在我心里一直有个未解之谜。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남색 중산복만을 즐겨 입으셨을까?’

    ‘老师为什么这么喜欢蓝色的中山装?’

  지금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중산복을 입혀 드리면서 갑자기 머리에 스쳐가는 빛이 있습니다.

最后给老师穿上这件中山装的时候,脑海中突然闪现出一道闪光

  ,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啊,原来是这样。

   남색 중산복은 바로 녹색군복이었습니다!

这件蓝色的中山装代表了绿色的军装。

  1938 7 녹색군복을 입고 항일전장에 나서신 선생님.

19387月穿着绿色的军装参加抗日斗争。

  1945 일본감옥에서 한쪽다리를 절단하시고 군인으로서의 출로가 막히자 문학의 길로 전환하신 선생님.

1945年在日本监狱,截断了一条腿,做军人的这条路被堵住了,转而成为一名文人。

  비록 충대를 붓대로 바꾸셨지만, 비록 군사전선에서 문학전선으로 진지를 옮기셨지만 여전히  남색 중산복을 입으시고 불의와 부정과 부패와의 싸움은 끝까지 멈추지 않으신 선생님.

虽然枪杆子换成了笔杆子,虽然军事战线转换成了文学战线,阵地变更,但是老师依旧穿着这件蓝色的中山装,同邪恶势力,不正之风,贪污腐败继续顽强战斗,永不懈怠。

  머리를 깎고 남색 중산복을 정중히 갈아입으시고 의용군대오에로 돌아가시겠다는 선생님의 유언에서 저는  남색 중산복이 곧바로 의용군의 녹색군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他剪了头发,郑重地换上了中山装,留下了遗言说要回归义勇军的队伍,我忽然意识到,这件蓝色的中山装就是义勇军队的绿色军装。

선생님.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에서나 사회의 민주와 평등을 위한 문학전선에서나 영원히  남색 중산복- 의용군의 녹색군복을 떨쳐입으시고, 총대와 붓대를 높이 추겨드시고, 우리들의 진두의 서시여 용맹이 돌진해 나아가시는 불요불굴의 투사이십니다!

老师。

是的。无论是在抗日斗争战线上,还是为了社会的民主和平等的文学战线上,他永远身穿义勇军的绿色军装,高举枪杆子和笔杆子,老师是站在我们的前头的,勇往直前,不屈不挠的斗士。

28. 비수와 투창

28. 匕首和投枪

  김학철은 1956년에 처음으로 잡문 『한약과 소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산문창작은 1985 「한담설화」를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이때부터 그는 산문창작을 통하여 자신의 독특한 인생관과 문학관으로 사회비리에 대한 비판에 앞장서 왔는데, 1998년에 그는 「나의 고뇌」라는 수필에서 “……소설하고는 영결이다. 반면 산문하고는 찰떡궁합- 아예 해로동혈을  작정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축박함과 변화무쌍한 현실은 작기로 하여금 느긋한 소설보다 쾌속반응을 기할  있는 산문창작에 전념하게   같다.

金学铁1956年第一次发表了杂文《中药与小说》。但他正式的散文创作是在1958年的《闲言碎语》开始的,这个时期,他开始通过散文创作,用自己独特的人生观和文学观率先批判社会弊病。1998年,他在随笔《苦闷》中这样写道:“……我和小说永别了,相反,倒是和散文是天作之合打算和他白头偕老。   似乎预示着余下不多的人生里,时光的短促和人生的变化无常,比起小说这种题材,散文更能让人做到快速反应,使得作家更加专心致志地投入到文学创作里。

  김학철은 평생 400 편의 산문을 썼다. 심학철 산문의 경우, 회상기와 잡문, 수필이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외에도 기행, 수기, 수상, 칼럼, 잡필, 창작담 등도 적지 않다. 김학철 산문의 주제에 대해 최미옥은 『김학철산문연구』에서 역사적인 착오에 대한 삼각한 반성,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비판, 고상한 인격미에 대한 찬미, 인간에 대한 불같은 사랑   가지로 개괄했고 전정옥은 『김학철수필연구』에서는 사회비판과 자기비판, 사회억업과  극복, 정의적인 인간성, 불타협의 인족애 등으로 분석하고 있다.

金学铁毕生写了400篇散文,虽然他的散文中,回忆录和杂文,随笔占了绝大比重,除此之外,游记,手记,随想,评论,杂文,创作感想等题材也不少。就金学铁散文的主题,崔美玉(音)在《金学铁散文研究》一书中将其概括为四点。对历史错误的深刻反省,辛辣地批判社会的腐败,赞美高尚的人性,对人民炽热的大爱。全正玉在《金学铁随笔研究》中,分析为社会批判与自我批评,社会压迫与攻坚克难,人与人之间的情谊,绝不妥协的民族感情。

김학철은 “불같이 사랑할  모르는 사람은 눈귀가 찢어지게 미워하지도 못합니다.”라고 말한  있다. 아래에 감학철의 산문에 끼친 노신이 영향을 살펴본 기초 위에서 ‘사랑 ‘미움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주로 문단의 병폐를 다룬 그의 문제작들을 살펴보자.

    金学铁曾经说过不懂得炽热的爱的人,也不会恨之入骨”,下面是金学铁的散文,从中我们可以看到鲁迅先生给他的影响。就“爱”与“恨”的命题,我们一起来看一下他的这些针砭时弊的文学作品。

노신의 방향

鲁迅的方向

  김학철은 아들 해양에게, 상해에서 반일테러활동을   노신의 자택 앞에까지 갔다가 용기 부족으로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두  감옥살이는 후회가  되지만  일만은 유감”이라고 여러  이야기했었다.

金学铁曾经对儿子海洋说,在上海参加反日武装斗争的时候,到鲁迅家门前但始终没有勇气走进去,就那样回去了,他几次提到“做了2次牢,从来都没有后悔过,但是只有那件事,一直是个遗憾”。

  최근 평론가 장정일은 김학철의 노신 서거 20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수기를 발굴했는데 아마도 노신을 다룬 최초의 글이라고 본다. 20년」이라는 제목의  글은 1956 10 16  『연변일보』에 발표되었는데 여기서도 김학철은 노신의 자택을 찾아갔다가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온 일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最近,评论家张正一发现了金学铁为纪念鲁迅去世20周年而发表的手记,这可能是最早与鲁迅有关的文章。《20年》为题的这篇文章,曾在19561016日刊登在《延边日报》上,在这篇文章里,金学铁也提到了去找鲁迅先生,但是没有勇气进去拜访的经历。

  20,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20年,20年的岁月就这样流逝。

  희망이란 과연 그런 것이었고, 절망 또한 그런 것이었다. 희망을 끈질기게 끝끝내버리지 않는 자에게는 절망이 감히 자기의  시끼먼 아가리를 벌리지 못하더라! 노신 선생의 폐부에서 우러나온   마디의 말과    줄의 글은, 그리고 그의 빛나는 생애의 업적들은 나를 고무해 주고 나를 끼우쳐 주고 나를 이끌어주는데 헤아릴  없는 공현을 하였다. –수수  천만 명의 그의 후대들에게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所谓希望就是那样,所谓绝望也是那样。对于如此坚强从未放弃过希望的人来说,绝望怎敢张开自己恶黑的血盆大口。鲁迅先生肺腑之言的每一句话,每一段文字,还有他毕生的丰功伟绩,如同影响着千千万万的子孙后代一样,也给予我深深的鼓舞和启迪,指引着我前进。 

  1997 김학철은 「노신 위대」라는 잡문에서 “노신은 번갈아들기로 덤벼드는 우파문인들과의 필전에서 무비의 용감성을 발휘, 억척스레 내내 선전분투를 했다. 그리하여 의도적인 망설들을 하나하나 맞받아쳐 치명타를 안겨줌으로써  위명을 만천하에 떨쳤다. ……노신의 삶이야말로 복배구적의 전국 속에서 단창필마로 연속 부절히 좌층우돌한, 힘에 겨운 전투의 인생이었다. ……가증스러운 ‘프룰레타리아 용사들의 비열한 협공 속에서 운명하는 그날까지 무소외의 정신으로 서전 분투한 노신, 그는 우리 진보적 작가들의 영원한 귀감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항시 우러러 받드는 위대한 스승이다.”고 했다.

1997年,金学铁在《伟大的鲁迅》杂文中这样写道:“在与轮番扑来的右派文人的笔战中,鲁迅先生无比勇敢,顽强搏斗。给那些有诋毁性质的妄说以致命的打击,威震天下……鲁迅的一生可谓是在腹背受敌的战局中单枪匹马,不停地横冲直撞,斗志昂扬的一生……面对那些可憎可恶的‘无产阶级的勇士’卑劣的夹击,鲁迅先生始终发扬大无畏的精神,英勇善战,他是我们所有进步中的作家们永远的楷模,也是我们一直尊崇爱戴的伟大的导师。

  보다시피 김학철은 평생 노신을 승배했다. 몰론 김학철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가 존경했던 문학가, 철학가, 음악가, 미술가, 정치가들은 많았다. 김학철은 사마천. 오경재와 조설근, 노신, 훙명희, 발자크, 마르크스. 톨스토이와 고골리, 숄로호프. 베트벤과 러시아 화가 레핀 등을 열광적으로 사랑했지만,  중에서도 노신은 단연 제일가는 스승이었다.

正如我们所看见的,金学铁毕生崇拜鲁迅先生。当然了,给予他影响,并且他很崇拜的文学家、哲学家、音乐家、美术家、政治家有很多。金学铁曾一度特别推崇司马迁、吴敬梓、曹雪芹、鲁迅、洪明熙、巴尔扎克、马克思、托尔斯泰、果戈里、肖洛霍夫、俄罗斯的画家列宾这些人物,但是其中鲁迅先生对他来说是最重要的人生导师。

  김학철은 1934 일본잡지를 통해 노신을 알게 되고    상해에  후부터 노신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또한 노신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김학철은 『고사신편』을 제외한 노신 소설을 거의 전부 번역했는데 번역이라는 재창작의 고된 작업을 통해 노신과 품격 높은 영혼의 대화를 했던 것이다.

金学铁1934年通过一本日本杂志认识的鲁迅先生。几年后来到上海,开始正式阅读鲁迅的作品。通过翻译鲁迅的作品,学到了很多东西。除了《故事新编》以外,鲁迅的小说几乎全部都翻译过。通过翻译这种艰苦的再创作,能够和鲁迅先生以及高尚的灵魂对话。

  김학철은 1997 다년간의 노신 연구에 기초해 연변의 문인들을 상대로 「노신의 고뇌」라는 특강을 하기도 한다. 그는 노신을 사숙하게  경위부터 시작해 그의 사상과 작품세계에 대해 깊이 분석했다. 그는 노신이 최후 3년동안  『차개정잡문』은 보풀이  정도로 보았다고 하면서 노신을 존경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基于多年对鲁迅先生的研究,金学铁在1997年以延边地区的文人为对象,进行了名为《鲁迅的烦恼》的演讲。他从鲁迅在私塾的境遇开始一直到他的思想和作品都做了深刻的分析。鲁迅最后三年写的《且介亭杂文》快被他读烂了。如此尊敬鲁迅先生的理由是这样的:

  “항상 백성을 위해서  무엇인가 말할 필요를 느낀다. 노신은 그렇게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노신을 존경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노신을 기리는 원인도 바로 거기에 있다.…… 작가는 불같이 일어나야 한다. 가슴속에 타는 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작가다. 불이 있어야 쓰게 된다.

    “总觉得为了百姓应该说些什么。鲁迅先生就是这样的一个人,所以,我特别尊敬鲁迅先生。这也是我们今天要纪念鲁迅先生的原因……作家的心应该是火热的。如果心中没有火在燃烧,什么都写不出来。有火热才能写文章。

  또한 김학철은 특강에서 에세이로는 영국의 수필을 제일로 치는데  특징은 한마다로 솜몽치에  바늘과 같다고 했다. 노신은 함축성 있게 쓰는 영국 수필과 중국의 위진문학의 전통을 결합해 “철인의 예지와 문학가의 열정이 융합된 참된 에세이- 수필”을 개발했다고 하면서 노신 잡문의 특징을 명쾌하게 설파했다.

在特讲中,金学铁称,散文数英国的随笔为最,它的特征用一句话说就像包在棉花团里的针一样。鲁迅先生巧妙地将英国的随笔与魏晋时期的传统文学风格融合,创造了“融汇了铁人的睿智和文学家的热情的真正散文随笔”,阐明了鲁迅杂文的特征。

  특강의 결론부분에서 김학철은 노신의 정신을 본받아 참된 작가의 사명을 자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特讲的最后,金学铁说,我们应该继承发扬鲁迅的精神,树立我们作家的使命感。

  “우리가 여태 살아온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편안하게 살자면 불의에 대해 모르는  하면 된다는  알게 된다.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면 불의에 도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노신 정신을 배우고  정신을 살려야 하겠다. 바로 우리 현실에 대해   하고 살자는 것이다.

“静静地回首我们的人生之路,要想安逸的生活请避开不义,然而要想像人一样生活就请挑战不义。也就是说我们要学习鲁迅精神,重新唤起这种精神力量,应该对现实状况说些什么。

우리민족의 노신정신

我们民族的鲁迅精神

  김학철은 반우파투쟁으로부터 ‘문화대혁명 이르기까지 정치권력과 극좌사조에 아부, 굴종해 인간성을 상실했던 동료, 후배 작가들에 대해 일괄적으로 비판, 타매한 것이 아니하 그후의 표현에 따라 사리 있게 판단을 하고 대처를 했다. 자기의 잘못을 진실로 참회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자에 대해서는 관용을 배풀고 그렇지 못한 자에 한해서는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다.

“反右派斗争”到“文化大革命”,有很多同事、后辈作家对政治权力、极左思潮阿谀奉承,丧失了做人的尊严,金学铁对这些人没有一味地批评指责,而是观察他们后来的表现,理智地判断对待。宽恕那些真诚地反省自己的错误,重新做人的人,反之,区别对待,绝不容忍。

  연변의  시인은 ‘반우파투쟁 김학철을 물고 늘어진 사람이었는데 추호도 회과자신하는 기미가 없이 김학철의 20세기 신화』가 한국에서 출판되자 일부러   사다가 이른바 반동적인 구절들을 마주알고주알 빨간 줄로 빡빡그어 고발하기도 했고, 다른  소설가는 임종을 앞두고 정신이 가물가물하는 마당에서도 “김학철이  잡혀 들어갔어? 아직도 무사한   이상하네……”라고 중얼거렸다 한다.

延边的一位诗人在“反右派斗争”时期,千方百计刁难金学铁,没有丝毫悔过自新的意思,金学铁《21世纪的神话》在韩国一经出版,他故意买了一本,将他认为的反动语句一一地用红色笔画线,打算告发金学铁。还有一位小说家在临终混混沌沌的状态下,还嘟囔着:“金学铁还没有被抓走吗?这么平安无事的好生奇怪啊……”。

  김학철은 『구태의연』, <설치류> 같은 잡문에서 이들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金学铁在《依然如故》及《啮齿类》的杂文中,辛辣地讽刺了这类的人。

  “나는 일찍이 우리의 일부 문인들을 설치류라고 부른  있는데  설치류들이  상이 장상으로 아직 계속 쏠고 있으니 너무 한심해서 하는 소리다.

“我早先曾经把一部分文人比作啮齿类,他们依然在不断地啃食,这让人很痛心。

  설치류의 생리적 특징은 끊임없이 자라는 앞니 때문에 잠시도 무엇을 쏠지 않고서는 목숨을 유지할  없는 것이다. 앞니가 너무 빨리 자라는 바람에 주둥이를 다물 재간이 없어서 굶어죽은 쥐를 나도 전에 한두  본적 있다.

啮齿类动物的生理特征是门牙不断生长,片刻都不啃食一些东西的话,是无法维持生命的。因为快速生长的门牙,根本没有能力闭上嘴,我也亲眼见过一两次就是那样饿死的老鼠。

  그러니 본능적으로 쏠고 쏠고  쏠고 해야 할밖에, 우선 살고 봐야겠으니까.

所以只能本能地啃食、啃食再啃食,为了生存,别无他法。

  우리의 재화 있는 소설가 정세봉도 이번에 그러한 설치류의 치화를 입었다. ‘장백산 발표된 그의  편의 소설이 힁래지액을 당할 번했기 때문이다……정세봉은 「볼셰비키의 이미지」라는 중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연변의  평론가가 공산당원의 얼굴에 먹칠을  소설이라고 비난하고 길림성 당위원회까지 고자질을 했다. 기실  작품은 독립적인 사고력과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로봇으로 전락한 윤태철이라는 노공산당원의 형상을 통해 좌경사조와 우상숭배의 해악을 비판한 역작이다. 김학철은 정세봉을 위해 변호하고 좌경적 사고방식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쩍하면 남을 물어먹는 자들을 두고 다음과 같이 풍자한다.

才华横溢的小说家郑世峰(音)这次也招引了啮齿之祸。郑世峰发表了一篇名为《布尔什维克形象》的中篇小说,延边的一位评论家指责说这是给共产党员的脸上抹黑,甚至将他告到了吉林省党委员会。其实,这部小说描写了一位失去独立思考能力,丧失自由意志,变得堕落麻木的老共产党员允泰哲(音),通过塑造的这一人物形象,批判了左倾思潮和个人崇拜,是一部非常优秀的作品。金学铁为郑世峰辩护时,这样讽刺那些不能摆脱左倾思考方式,动不动就乱咬别人一口的人。

  “그 설치류들을 절멸하자면 아무래도 비상한 구제법이 강구돼야만 하겠다. 예컨대 낯을 봐주지 말고 기차 없이 지명해서 폭로를 하는 따위,  추악한 몰골을 백일하에 드러내 보이는 따위.

“要想灭绝那些啮齿类的话,还是得强化使用非常的消灭手段,例如,绝不留情面,绝不手下留情,点名道姓,纰漏他们的错误,还比如将他们的丑陋行径公之于众,诸如此类”。

  김학철은 자기를 반성할  모르고 허풍을 떠는 자들에 한해서는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야 한다.”는 노신의 원칙을 철저히 따랐다. 그는 정령의 남편 진명에게 보내는 편지에게 “나는 노신처럼  누구의 동정도 바라지 않고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듯이 상식과 기본을 벗어난 행위, 문단에 군림한 저질적인 인간들을 “가차 없이 지명해 폭로”했다. 원로작가로 대접을 받는 사람들도 김학철의 비판에서 지유로울  없었다. 그래서 김학철 잡문이 일단 발표되면 불뚱이 자기에게 튕겨 올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후에도 그때의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 울화병이 터지는 분들이 계신다.

金学铁对那些不知反省,只知道吹牛的人彻底执行鲁迅先生“痛打落水狗”的原则,如同金学铁给丁玲的丈夫陈明的信中写的一样“我会像鲁迅先生一样,不期待任何人的同情,也不会原谅任何人。”他一一揭露了那些违背常识和准则的行为,称霸文坛的那些低俗文人。在金学铁的指责中,就连受到元老作家待遇的人也都不能得自在。所以,一旦金学铁的杂文被发表,有很多人都担心火花会溅到自己身上,也有很多人事后无法排遣自己的压力,抑郁不堪。

  아마도 김철과 김학철의 논전이 가장 전형적일 것이다.

金哲和金学铁的论战可能是最好的例子。

   김철은 연변작가협회 주석을 지낸  있는 조선족의 대표적인 시인인데 『연변문학』 2000 5월호부터 『후세에 알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는 자서전을 연제 했다. 그는 1957 반우파투쟁    『좌파행진곡』을 두고 “이제  읽어보니 우습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하지만 “역사의 유물”인 만큼 전편을 소개한다고 했다. 시세에 편승해 극좌적인 경향을 구호 식으로 호소한 시인데 ‘반우파투쟁당시에는 ‘우파 잡이 선동한 시로 이용되었었다.

金哲曾任延边作家协会主席,他同时也是朝鲜族的代表诗人20005月开始,他在《延边文学》上连载了《不想告诉后代的故事》,1957年反右派斗争时,他写了一首诗《左派进行曲》,他说如今看起来,感觉很可笑,很傻”,但是作为“历史的遗产”还是介绍了全篇。这首诗顺应了当时的时局,富有极左的思想色彩。在“反右派斗争”时期,这首富有煽动性质的诗曾被利用为“揭发右派”的作品。

  김학철은 김철의 글을 보고 『매질군의 넔두리』라는 잡문을 발표한다.  잡문은 ‘쓰고 싶지 않은 ’, ‘그놈들을 엎어놓고 매우 쳐라!’, ‘흐뭇한 추억. 은밀한  자랑이라는 3 부분으로 나뉘지는데  부분에서는 “우리 사상계와 문예계가 혼돈세계로 돼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부득불 생나무가지라도 가르기를 않을  없다”고 했고, 김철의 시는 20세기  변학도의 호통소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까밝힌다.  번째 부분에서는 김철이 반우파투쟁   아름답지 못한 각색을 폭로하고   운동  억울하게 수모와 괄시를 당한 문인들, 그들의 “비인간적인 혈누사”를 열거하면서 “이 모든 재난을 갖다 안긴 장본인이 이제 와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우습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하지만이라니”하고 대성질호한다. 그리고  번째 부분은 다음과 같다.

金学铁看了金哲的文章,发表了一篇杂文《打手的诉说》,这篇杂文分为三个部分,即“不想写的文章”“打倒那些家伙,鞭打他们”“心满意足的记忆,隐秘的自豪 。在第一部分,他写道“为了阻止思想界和文艺界形成混沌不堪的局面,我们不得不削减树的枝枝叶叶”,他单刀直入地说金哲的诗是“21世纪版卞学道(《春香传》里的反面人物)的呵斥之声”,第二部分,揭露了金哲在反右派斗争时所扮演的并不光彩的角色,一一列举了在那场运动中被冤枉侮辱和歧视的文人,列举了他们“非人道的血泪史”,大声直呼“所有灾难的罪魁祸首居然说了这样一句话‘如今看起来,感觉很可笑,很傻’” 第三部分如下。

  “자성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늑대울음 같은 이른바 ‘라는 것을, 장장 3페지 반에 걸쳐 내로란 듯이 버젓이 초대형으로 재활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如果稍稍有点悔改的意思的话,都不会用这种狼嚎的方式有模有样地把诗写成3页半这样的超大篇幅。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적어도 이런 정도로 자세를 낮출 줄은 알았을 것이다.

如果是个有良心的人,至少应该知道“内疚”二字。

  모가지가 윈쪽으로/ 비뚤어지지 않은 놈들은/ 사정없이 깡그리 몽땅/ 깡그리 몽땅 때려잡아라/ 사정없이 깡그리 때려잡아라/ 윈쪽이다 윈쪽/ 윈쪽을 모르느냐/ 윈쪽이다 윈쪽/ 윈쪽으로 비틀어 꽂아라 윈쪽/ 윈쪽 만세 윈쪽 만세 윈쪽 만만세!

脖子向左/不歪倒的家伙/不留情面地全部都/全部都给你们抓来/不留情面地全部给你们抓起来/往左往左/不知道左边是哪边吗?/扭到左边,插进左边的队伍里/左边万岁左边万岁左边万万岁!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런 식으로 편푹을  줄인다는 최저한의 지혜쯤은 지녔을 게란 말이다.

如果是有良知的人,最低应该有这样概括的智慧。

  아무러한 자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언제나  잘난 멋에 겨워서 살고 있는 인간을, 건전한 사회는 결코 용납하지를 않는 법이다.

毫无内疚感,总是活得意得志满的,健全的社会绝对不能容忍这样的人。

  어쩌면  지경으로 겸허하지 못할까,   이때까지 어쩌면  지경으로 하늘이 높은지 땅이 낮은지를 모르고 살아왔을까.

怎么能如此不知道谦虚呢?今天到了这个地步,居然不知道天高地厚。

  작가로서 지녀야  덕목의 첫째가 ‘겸허라는 것도 여태 모르고 살아왔던 말인가.

作为一个作家,应该有的品性第一条就是“谦逊”,活了这么长时间居然连这个都不知道吗?

  ‘1돈어치의 반성과 100냥어치의  자랑으로 뒤버무린, 쉰내 나는 비빔밥.’

这就是一分钱价值的反省和100两的炫耀掺和在一起的、发馊的拌饭  이것이 이번에 되살아난 ‘좌파행진곡등에 대한 나의 준엄하고도 공명정대한 평가다.

这就是我对重新问世的《左派进行曲》做的严厉而光明正大的评价。

  우리의 사상계와 문예계가 흑백불분의 혼돈세계로 돼버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는 부득이, 그러나 결연히  글을 썼다.

我不能眼睁睁得看着思想界和文艺界成为黑白不分的混沌世界,我不得已,但是毅然决然地写了这篇文章。

  지금 우리의 민족사회는 시비선악을 마구 뒤섞어 끓인 혼돈탕으로 돼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분별없이 날뛰는 ‘프룰레타리아용사출신  지난날의 매질꾼들에게는 톡톡히 제독을 주어야 한다. 다시는 활갯짓을 못하게시리.

现在我们民族社会有成为是非不分,善恶不分的混沌局面的危险。所以那些没有明辨是非能力的猖獗的“无产阶级勇士”,也就是过去的那些打手们,应该狠狠地给他们制毒,不能让他们再张开翅膀肆意横行。

  매질꾼의 철늦은 넋두리가 아니었던들 나는 이런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썼을  만무하다.

如果没有这些打手们不懂事理的控诉的话,我绝不会写这种本来就不愿写的文字。

   글을 보고 연변문단은 이제야 사자와 호랑이의 싸움을 보게 되었다고 숨을 죽이고 하회를 기다렸다. 김철은 마침내 「나의 하고 싶은 말」이라는 공개편지를 통해 반격을 가해 왔다. 그는 50  소중히 가꿔은 우정, 천금을 주고도 바꿀  없는 소중한 감정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린 김학철에 대해 유감을 표시함과 아울러 “쩍하면 글로 풍자하고 타당치 못한 비유까지 해가면서 욕질하거나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어디 선배다운 처사입니까.”하고 힐난한다. 어디서 반우파투쟁 당시 자신은 ‘하급문인이라 작가협회 상층의 내부암투상황을   없었는데 어떻게 “모든 재난을 갖다 안긴 장본인”으로 취습할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자기가 만약 매질꾼이라면 으레 감옥에 가야  사람이겠지만 여전히 수도 북경에서 ‘북경영예시민칭호를 받고  보내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좌파행진곡」은 “그  우리가 열에 들떠서  아닌 , 어런 식의 정치시도  적이 있었노라, 부끄럽지만    엉터리 시가 어떻게 돼먹은 물건짝인지 후세의 사람들이 비판적으로   읽어보십사”하고 내놓은 것이라고 변명한다. 마지막에는 김학철에게 엄포를 놓았다.

延边文坛都在屏住呼吸观看狮子和老虎的撕战,等待金哲的回音。最后,金哲通过一篇《我想说的话》的公开信进行反击。金哲回应说,他们50年的友谊,千金难买的感情被金学铁舍弃地一干二净,对此,深表遗憾,他指责说“动不动就写文章讽刺,用不恰当的比喻进行辱骂和人身攻击,这是一个前辈应有的作风吗?”紧接着他说“在反右派斗争时期,他只是一个‘下等文人’,根本不知道作家协会上层的内部暗地里的斗争状况,怎么能把我当成‘所有灾难的罪魁祸首呢?’”他带着讥讽的口吻说,如果我真是一个打手的话,早该进监狱了,但我现在在首都北京,依然过得很好,还获得了‘北京荣誉市民’的称号,还有,《左派进行曲》是“那时我们在当时闹得沸沸扬扬的时候,写的似是而非的诗,这种形式的政治诗我也写过,感到很惭愧,这种荒唐的诗写得到底有多么糟糕,就让后人去作反面教材吧”最后,他还不忘恐吓金学铁。

  “솔직히 말해서 선생의 글을 읽은 다음 당장 법에 걸려고 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형사소송법  246 무함죄. 개인명예침해죄로 말입니다. 북경의 많은 사법게 권위인사들의 자문도 받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지, 한평생 옥살이를 진저리나게 해온 사람을, 그것도 연로한 사람을, 피고석에 서게 한다는 것이  그렇고 친구들의 권고도 있고 해서 잠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만 나의 소송 권한은 아직도 보류하고 있다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说句实话,读完先生的这篇文章,我觉得您已经触犯了法律,即中华人民共和国刑事诉讼法第246条诬陷罪,侵犯个人名誉罪。我已经咨询了很多北京司法界的权威人士,但是有一点一直是我的顾虑,您是坐了一辈子大牢的人,也是一位年迈的老人,站在被告席上实在是委屈您了,也是听了朋友的劝告,所以暂时改变了主意,但我依然保留着诉讼权限,这一点我已经明确跟您说了。

이제 김학철의 대응이 궁금했다. 연변문단은 일촉즉발의 긴장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김학철은 『연변문학』2001년 3월호를 받아 김철의 공개편지를 보고 나서 일단 연변문학월간사 장자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철의 글에 대한 반론을 할 테니 다음 호에 40매 분량의 지면을 달라고 했다. 장지민은 이미 엎지론 물이요 또 누구의 분부라고 김히 거역을 하랴. 5월호에 고스란히 40매 분량의 지면을 할애해 김학철의 공개편지- 『영예시민귀하』를 실었다. 김학철은 원한 맺힌 김철의 「좌파행진곡」이 느닷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이건 억울한 삶을 살다간 환난문우들에 대한 참을 없는 모독이다! 분격 때문에 미처 앞뒤를 가릴 사이가 없이, 오로지 죽은 이들의 넑을 가라앉히려는 진혼의 일념으로 사정없이 채찍질 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이성적이였어야 했다고 반성한다.

现在好多人等待金学铁的反应。延边文坛的气氛一时间剑拔弩张,一触即发,金学铁在读完《延边文学》2001年3月刊的金哲的公开信后,给延边文学月刊社的张志敏(音)打了电话,为反驳金哲的文章要了下个月期刊的40页版面。张志敏以为覆水难收又哪敢拒绝金学铁的吩咐,在5月刊上腾出来40页的版面,刊登了金学铁的公开信《荣誉市民阁下》,在这封信中说,他反省自己当时看到金哲的《左派进行曲》时,真是义愤填膺。“这是对那些饱受生活冤屈的患难之交们人格亵渎,难以容忍!”由于当时情绪过于激动,没有时间一一细度,只是“一心想安慰那些亡者的灵魂,所以要对其进行无情的鞭策。”但是现在看来,当时应该“保持一些冷静才对”。

그러나 마지막은 파고석 전문가라는 소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但在信的最后,金学铁以《被告席专家》为小标题,如下写道:

“‘반성 1돈어치에 제 자랑 100냥어치라는 평가는 영원히 유효하다.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을 때까지 유효하다.

1分钱价值的反省和100两价值的炫耀’的评价永远有效,哪怕是东海干枯,长白山枯萎,也永远有效。

그래서 그게 통해 주지를 않으니까 무서운 끌어다가 잡아 눌러보자는 말씀이신가?

也就是说那种方式不通于是打算调用恐怖的“法律”来压制人吗?

임꺽정이가 외딴 산골짜기에서 관군 대장 연천령과 둘이 칼로 맞붙었을 , 연천령이 받아라! 호통을 치니까, 꺽정이는 조소 반 욕설 반 연천령을 꾸짖었다.

林巨正和官军队长杨千令(音)在山沟刀枪撕战对峙之时,杨千令说:接刀!”一声大喊。林巨正半嘲笑半辱骂地指责杨千令。

그까짓 칼을 누구더러 받아라 말아라, 되지 못한 놈 같으니, 그 칼 가지구 네 집에 가서 개 껍질이나 벗겨라!

谁接那种破刀臭小子,你还是回家拿这个刀,扒你家的狗皮!”

-뉘게다 감히 걸겠다 말겠다 보류하겠다……가소롭게! 그 따위 헌 수작을랑 방귀에 놀라 달아나는 누루새끼에게나 써먹어라!

你胆大包天,跟谁说这说那……真可笑!就你这样的把戏应该用在‘胆小如鼠的狍子’身上。

번거로움을 끼쳐 미안하지만 사법계(법조계) 권위인사(귄위사)들에게 내 대신 한 번 좀 물어보아라.

不好意思,给您添麻烦了,替我问一问那些司法界(法律界)权威人士(权威者)。

무고한 간부들과 정직한 지식인들을 시퍼런 비수로 붉은 심장을 노리는 백색테러하고 무함(무고), 22년씩 강제노동에 내몰리게 한 행위, 그 행위는 무함죄(무고죄), 개인명예침해죄(명예회손죄) 해당되는지 되는지를 물어보라.

对那些无辜的干部和正直的知识分子,“用锋利的匕首刺向他们的心脏,制造白色恐怖”,“诬陷”,导致他们22年的强制劳动的行为,是否属于‘诬陷罪(诬告罪)’‘个人名誉侵害罪(名誉毁损罪)’,你去问问他们吧。

그리고 40년이 지나서, 작가협회 기관지에다 장장 3페지 반에 걸쳐, 스 사람 잡이시 마치 무용담처럼 당당히 재활을 시킨 행위, 그 행위도 해당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한 번 좀 물어봐 달라. 비록 그 법조계의 귀위자들이 쥐뿔도 모르는 엉터리 권위자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还有,40年后,在作家协会的机关报上用了长长3页半的篇幅,把坑害人的诗”公然地像有趣的武侠故事一样重新提起,你去问问这种行为是否也属于犯罪行为。虽然那些司法界的‘权威者’是一窍不通的荒唐‘权威者’。

그리고 귄위자들에게 비권위자 기르치는 말을 고대로 전하라. 무고죄 법기관에 거짓 신고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헝벌과 징계 터분을 받게 라는 것을, 그 가짜 권위자들에게 분명히 전하라.

还有记得将我这个‘非权威者’告诉你的话一五一十地转告给那些权威者。所谓的‘诬告罪’指的是向司法机关虚假举报,导致他人接受了刑事处罚或者拘留的罪行,你一定要转达给那些冒牌的‘权威者’。

패가망신을 하고 싶지 않거든 다시는 중화인민공화국 형사소송법 246조를 협박 공갈용으로 써먹지 말라. 그건 협잡군 망나니들이나 하는 짓이다. 미리 경고를 해둔다. 단매에 박실을 내줄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如果不想造成家破人亡的悲惨局面的话,就别再利用中华人民共和国刑事诉讼法第246条来威胁恐吓我。那是骗子和地痞流氓的行径,再次警告你,不想一棍子打扁你的。

명문대 출신답게 이성적으로 냉정히 처사하기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잃는 것이 더 많아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올리브가지를 건네면 받아줄 용의가 아직까지는 없지도 않다.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我希望你能有一个名牌大学出身的人应该有的样子,如果不这样的话,可能你会失去很多的东西。如果你能伸出橄榄枝的话,我不是没有不接受的想法,这是最后一次机会。

김학철의 『명예시민 귀하』가 나간 세상은 다시 조용해 졌다. 반년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반박은 없었다. 김학철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더 공방전을 벌려 보았자 망신만 하게 될 줄을 알았던 것 같다. 김학철은 훗날 북경으로 대신 문학상을 받으러가는 아들에게 김철 선생을 만나거든 옛날처럼 깍듯이 인사해라.라고 당부했다.

金学铁的《荣誉市民阁下》发表后,整个世界变得安静了。半年过去了,一年过去了,依然没有反驳。似乎不能成为金学铁的对手,就算是再拉起攻防战也只会让自己丢脸。后来,儿子代替金学铁去北京领取文学奖,金学铁嘱咐他说,“如果碰到金哲老师的话,要恭恭敬敬地问候。

  김철 선생도 그간의 자서전적 에세이를 모은 『끝나지 않은 인생드라마』에서는 말썽을 일으킨 「좌파행진곡」을 아예 빼버렸고 무슨 이재 읽어보니 우습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했다 운운의 망신살이 뻗친 서술을 완전 삭제해 버렸다. 그리고 김학철선생이 2001년 9월 25일 세상을 뜨자 「잘가요. 학철 선생님!」이라는 추모의 글을 발표했다.

金哲那段时间在《尚未结束的人生故事》自传随笔录中,将引起是非的《左派进行曲》删得一干二净,还有什么“现在读起来,既感到好笑又感觉像个傻子”的晦气言论一并删除了。在金学铁先生逝世的2001年9月25日,金哲还发表了追悼文章《走好,学铁老师!》

외다리에 한생을 지탱하면서 힘든 삶을 사시고 그렇게도 열심히 몸을 단련하시더니 하루하침에 무정하게 훌쩍 가버리시다니 참말로 섭섭합니다. 사람이 싸우다가도 정작 멀리, 그것도 영영 떠나보내고 나면 오히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인간 상정인가 봅니다. 솔직한 말이지만 우리 민족문단에 나타난 별 하나를 잃은 것으로 하여 우리는 무한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一条腿支撑了一生,生活如此艰难,还坚持每天锻炼身体,突然有一天无情地离开了人间,真是让人感到难过,交手过后,永远的离开人世,反而成为我心中的痛,这可能就是人间情怀吧,说实在的,我们民族文坛上失去了一位巨星,因此,我们都沉浸在无限的悲痛之中。

지난 연변문학 창간 50주년에 갔을 때 한 번 만나 시원히 오해를 풀려고 생각했댔는데 끝내 그럴 기회도 없이 영영 가버렸내요. 돌이켜보면 인생이란 별 것도 아난데요. 그래서 저의 아픔은 가신남의 명목이라도 더 빌고 싶은 것이 진솔한 고백입니다.

上次“延边文学”创刊50周年的时候,我想去和先生解除误会,但是连这个机会也失去了,先生就这样走了,回首人生,真是没有什么,所以我想再次向老师表达真诚的哀思。

이미 세상이, 특히 고인이 다 아는 사살입니다만 작가들끼리 싸우다가도 풀어지고 풀어지면 또 다시 끔찍한 문우가 되는 일은 고금중외 문단에 흔히 있는 일인데 잠시나마 우리 사이에 있었던 깔깔한 이야기는 후세사람들이 쓰게 될 문단 역사의 한 토막 에피소드가 되지나 않겠는지요……"

现在整个世界,特别是已故之人都明白的事实,作家之间争吵后再不断解决矛盾,还会成为特别好的朋友,这是古今中外文坛上常有之事,我们之间的那些故事,哪怕就是一段,不知会不会出现在未来后辈的文章中,成为一段小插曲呢?

가흑한 정치는 범보다 무섭다

苛政猛于虎

김학철은 자성할 모르는 자에 한해서는 가치 없이 지명에 폭로했지만 자그마한 실수로 가지고도 깊이 반성하는 어질고 착한 이들에 대해서는 페어플레이를 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존경했으며 평생 약자의 편에 서서 불우한 문인들을 깊이 동정했다. 이러한 작가의 고매한 인격과 깊은 사랑은 그의 수기 「김창걸 선생」, 「세월과 더불어」, 「시인 조룡남」, 등에서 볼 수 있다.

金学铁只对那些不知道到反省的人“不留情面,指名道姓地揭发”,但是对那些知道自省的善良之人不仅公平对待,而且从内心中还很尊敬他们,他一生站在弱者的角度,深深同情那些不幸的文人。在他的手记《金昌老师》,《与岁月一起》,《诗人赵南(音)》中可以看到这种作家的高尚人格与深深的爱意

김창걸(1911~)은 광복 전부터 창작활동을 했고 「암야」와 같은 명단편으로 조선족문학의 기틀을 잡은 소설가요, 정판룡, 최윤갑, 권철 등 쟁쟁한 학자들을 키위낸 연변대학교의 초대교수인데 시인 이욱과 더불어 조선족문학의 시조로도 불린다. 그는 1953년 연변에 온 김학철을 연변대학교에 초대하여 문학 강연을 마련하였고 김학철이 만기출옥한 후에도 만나 따뜻하게 위로를 주었다. 특히 섬서성 서안에 살고 있는 김학철의 전우 서휘 선생의 편지를 전해 주기도 했다.

金昌杰(1911~)在光复前开始了创作活动,在《暗夜》等一些刊物上经常发表文章,他是创建朝鲜族文学基本框架的小说家,也培养了如郑判龙,崔允甲(音),权哲等出色的学者。他是延边大学的名誉教授,和诗人李旭一起,被称为朝鲜族文学的始祖,1953年,他邀请金学铁来到延边大学进行文学讲演,金学铁在期满出狱后,他去看望金学铁,还帮助金学铁在陕西西安的战友徐辉捎给金学铁信件。

김창걸은 노년에 지병이 도지어 동안 입원을 하였다기 퇴원하였으나 걸음걸이가 전만 못했다. 김학철이 한 번 찾아가 문안을 하려던 차에 김창걸이 개화장을 짚고 찾아왔다.

金昌杰晚年的时候,身患疾病住院数月,后来虽然出院了,但还是无法正常走路,金学铁有一次想去看望他的病情,而他却拄着拐杖找上门来了

딱두 하시우. 그래가지구 무엇하러 오신단 말씀이오. 엎어지기나 하면 어찌하실라구! 김학철이 나무라듯 이렇게 말하며 부축해 앉히니 김창철은 아니 그런 아니라……하고 숨찬 말로 해명을 하는 것이었다.

金学铁用责备的口吻说:“你可真是的走路如此不方便怎么过来了呢,要是摔倒可怎么办啊?”将他扶到座位上,金昌杰意味深长地解释说“不是的……”

내가 아직 발루 걸을 있을 …… 학철 선생한테 양해를 구해 두자구…… 이렇게 찾아온 겝니다.

“我现在趁还能走路……想求得学铁先生的原谅……所以找上门来了

왕청같이 이건 말씀이시오?

“为什么突然这么说?”

반우파투쟁 내가 학철 선생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잖습니까. 그게 끈히 맘속에 걸려서…… 도무지 내려가 주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당시의 형편이 발언을 하잖구는 고비를 넘길 재간이 없겠기에 하기는 해 놓구서두……

“反右派斗争的时候,我不是批判了学铁你吗?这件事一直让我耿耿于怀。始终放不下。当时不得不这样,要不无法逃过劫难啊

김학철은 어이가 없어서 김창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느 왕금년 일을 새삼스레 되지는 그의 우직함과 고정함에 감동보다는 오히려 민망한 생각이 앞을 서서였다.

金学铁一句话都说不出来,只是呆呆地望着金昌杰的脸庞。翻出陈年旧事,他的愚直和固执,让金学铁与其感动,不如说是难为情

찬바람 맞으며 눈물이 흐르는 노안을 씀벅거리는 김창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그 어깨를 쓰다듬었다.

在冷风中,年迈的金昌杰眨着眼,眼中泛着点点泪花,金学铁一下子抓住了金昌杰的手,剩下的一只手抚摸着他的肩膀。

잠꼬대하러 오셨소. 백주대낮에…… 말하고 김학철이 하하 웃으니 김창걸도 게면 찍은 웃음을 허허 따라 웃었다. 눈물이 흐르는 노안을 씀벅씀벅하면서.

“你是来梦话吧,大白天的。”说完,金学铁哈哈大笑,金昌杰也随着笑了起来。褶皱的泪眼一眨一眨的。

이어서 김학철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后来,金学铁这样写道:

지난 인성을 아주 잃은 정치운동들에서 마음에 없는 마디씩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안 하고 배기는가. 그런 것들은 애당초 말할 거리도 못된다. 그렇지만 우리 창걸 노선생은 저 혼자 양심의 부담을 만들어가지고 장장 20년 동안 끙끙 앓으며 낮과 밤을 살, 아왔던 것이다.

“过去的那段时期,在那场失去人性的政治运动里,哪有不说几句假话的不说假话在劫难逃啊。那些事根本不值一提。但是我们昌杰老师带着这种心灵的负担,长达20年的时间战战兢兢,不分昼夜,就是这样生活过来的。

날을 마지막으로 창걸 선생은 우리 집에 아주 발길을 끊었다. 그의 말 대로 발로 걸어 디닐 없게 것이다. 개화장을 짚고 지척지척 걸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从那天以后昌杰老师不再来我家了,用他的话说,无法走路了从此他拄着拐杖也无法动身

노작가 파금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근년에 써낸 글들을 읽어보고 우리는 깊이 감동하고 인격을 새삼스레 우러른다.

读一读近年来老作家巴金用忏悔之情写的文章,我们深深地被感动着,也重新被他的人格魅力折服。

나는 짧은 글을 쓰면서 우리의 김창걸 선생이 어떠한 인격자인가를 새삼스레 곱새긴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더욱 존경해 마지않는다.

写这篇短文,我又重新领会金昌杰老师的人格魅力,对他升起无限的尊敬爱戴之情。

김학철은 선배를 존경하고 자신을 참회하는 선배를 오히려 보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와 같은 수기에서 있지만 자신과의 연루 불행하게 운명한 서헌 시인과 가족에게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며 조룡남 시인과 같은 후배들에게는 따뜻한 사랑과 격려를 아까지 않았다. 김학철은 조룡남을 두고 「시인 조룡남」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金学铁对前辈们很尊敬,尤其是对那些忏悔自己错误的前辈很是关怀有加。这些内容我们在《和岁月一起》的手记中可以看到。由于受到自己的牵连,对已故的徐宪(音)诗人及其家人,这么多年一直深感愧疚平生怀着一颗赎罪的心过日子。对于像赵龙南(音)等后辈,他不忘给予他们深切的关爱和鼓励。金学铁专门为赵龙南写了一篇文章叫《诗人赵永南》。内容如下: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의사무사한데 아마도 1955년 가을께가 아니었던가 싶다. 훈춘중학교에 가 강연을 할 때 처음 만났던 스물 안팎의 총각 선생. 그가 대개 이 시인 조룡남 같다.

“由于时隔久远,有些记不清了,应该是1955年秋天的时候吧,去珲春中学做演讲,见到了这位20岁左右的年轻老师,他大概就是‘诗人赵龙南’吧。

내가 조룡남을 다시 만난 것은 문화대혁명 끝이 나가지고 우리의 많은 작가들이 22년 동안의 피눈물 나는 고역살이에서 풀려나 육속 문단으로 복귀를 할 즈음이었다. 그러니까 1982년 초겨울께 쯤이 됨직하다. 근 30년이란 세월을 제 각기 살면서도 우리가 겪은 고초는 다 어슷비슷해 그야말로 마소보다 못한 인생 굴욕적이고도 지리감스러운 나날이었다.

我第二次见到赵永南的时候,是在“文化大革命”结束,我们很多作家从22年的苦役生活里解脱出来,陆续回到文坛,所以应该是1982年初秋的时候,近30年的岁月,我们虽然各过各的日子,但是经历的苦楚都是相似的,真可谓是‘不如牛马的人生’‘既屈辱又百无聊赖的岁月’。

하지만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자금은 갈구하는 아상의 실현을 위해 꾸준히 필경에 정진하고 있다. 그는 60세, 나는 80세.

但是我们没有死,成功活了下来。所以为了理想的实现笔耕不辍,他60岁,我80岁。

만리장성을 쌓은 부역에 끌려나왔다가 죽은 남편을 찾아 나섰다는 전설의 여인 맹강녀, 그 맹강녀를 통해서 시인 조룡남은 사상이 발로가 되고 있다.

传说中,孟姜女去寻找因被拉去服役修筑长城而丧身殒命的丈夫,赵永南通过孟姜女这一人物,发表了自己的感想。

장성보다 왕조를 넘어오면서

장성보다 세대를 살아오면서

그녀는 만천하의 폭군을 공소한다

폭풍같이 준열하게 통책한다.

穿越过比长城还要漫长的王朝

比长城还要漫长的岁月

那个女人控诉着天下的暴君

像暴风骤雨、严厉地呵斥着

제철 만난 이어모양 싱싱하던, 물정 모르는 애숭이 총각 선생이, 날벼락 같은 프룰레타이아 독재 철퇴(쇠몽등이)를 맞고 하루아침에 계급의 으로 전락을 하니- 그놈의 신세야 아주 조진 게 아니고 뭐겠는가.

这样一个像应季生鲜的鲤鱼一样,不懂世故圆滑的年轻教师,突然有一天被“无产阶级专政”当头棒喝,沦为“阶级敌人”—这不就是误了前程又是什么呢。

신세 조긴 인간이 20여 년 동안에 당해야 했던 수모와 고통은 과연 어떠했을까.

20余年饱受的屈辱和痛苦该是多么的不堪啊。

쌓이고 쌓였던 울분이 때를 만나 자연스레 분출을 하고 있는 우리 조룡남의 시가 아닐까.

那长久累积的愤怒,到时候自然而然地喷发出来,这不就是赵永南的诗吗?

한편 조룡남은 그의 「불멸의 영령」이라는 글에서 김학철을 다음과 같이 추억한다.

另外诗人赵永南在《不灭的英灵》中这样回忆金学铁的。

그것은 1985년 초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그 겨울, 나는 재수 없이 화재를 입고 알몸으로 나앉게 되었다. 때마침 작가대표대회가 열렸는데 회의 첫날 선생께서 오시자마자 나부터 찾아 손목을 꼭 잡아주시며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그날 저녁 선생님께서 아들 해양씨를 시켜 쌀 100근과 함께 전해주었던 것이 곧 이 소중한 친필편지이다.

“那是1985年初冬的时候,那个冬天,我们家不幸发生了火灾,失去了家园,当时,正赶上作家代表大会召开,会议的第一天,老师一赶来就握住我的手腕,连连安慰我。当天晚上,老师让儿子海洋给我们家送来100斤大米,附上一封珍贵的信。

조룡남 선생

赵龙南先生:

눈깔 하느님의 선생 일가에 거듭 내리는 재앙에 분격을 금할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재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던 선생의 말씀을 듣고 저는 孔子 苛政猛于虎라고 말이 과연 철리라고 찬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정직한 사람들이 살아나가기가 왜 이다지도 힘이 듭니까!

看到老天‘赐给’你们家接二连三这么多的灾难,无比愤怒。但是听完你说的,比起政治的灾难,这些都算不了什么。我忽然联想到孔子说过的“苛政猛于虎”的话,禁不住感叹真是哲理。为何正直的人活的如此艰难。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위문을 올리는 바입이다.

真心地送上我诚挚的慰问。

김학철

                                        23/11.85

                                        金学铁

                                       23/11.85

화재후 새집에 이사하다보니 우리는 행운스럽게 선생님과 멀지 않은 이웃으로 살게 되었다. 그래서 화재 덕분에 우리 집 아이들까지도 선생님과 친교를 맺게 되는 연분이 생겼으니 정말 화중지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들이 가끔 학교에서 돌아오다 선생님을 만나 교담했다거나 선생님을 부출하여 그 가파른 강둑 층계를 모시고 올라갔을 때는 너무 좋아 집에 돌아와서는 반나절씩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선생님께서도 그것들과 아주 정이 들었다. 그래서 후에 그것들이 대학레 입학했을 때도, 외국유학에 뽑혀 떠날 때도 아이들을 불러서 선물을 주고 장하다 면려하면서 우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시었다.

这场火灾过后,我们很幸运地搬到了离老师家不远的地方,做了邻居。所以因为这场火灾,我们家的孩子和老师成为了挚交,结下了缘分,不能不说是因祸得福。他们偶尔从学校回来,找老师聊天交谈,扶着老师踏上陡峭的江堤,回来的时候心情特别好,还和我们炫耀半天,老师和他们的感情很深。所以,后来无论是他们上大学还是被派往国外留学,老师都把他们叫过去,给他们礼物,并夸他们是好样的,勉励他们,与我们一同分享喜悦。

선생님 장례 이튿날 나는 아니에게 전화를 걸어 선생님의 비통한 소식을 알렸다. 전화에서 나는 두 아니의 흐느낌소리를 들었다. 그날 두 아이는 모두 연길 쪽을 향해 3분간 묵도를 드리는 것으로 선생님을 추모했다 한다. 그렇다. 나는 그애들의 가슴 속에 살아계시는 선생님을 분명 본 것이다. 기쁜 눈물 고여 흐르는 아비의 눈으로!

在老师葬礼的第二天,我给孩子打了电话,告知了他们这一悲痛的消息,在电话里,我听到了孩子们的啜泣声。那一天,他们向着延吉的方向进行了3分钟的默哀,追悼老师的离去。是的,用这含泪的双眼,我分明看到了依然活在孩子们心中的老师!

29. 최후를 이렇게

29 晚年的生活

경상도 밀양행

庆尚道密阳行

김학철의 마지막 한국행에 관해서는 중국 『장백산』 잡지사의 남여전 사장 그의 「김학철 선생과 장백산」이라는 글에서 소상히 전해주고 있다.

中国《长白山》杂志社南永前社长所写的《金学铁先生和‘长白山’》一文中,详细介绍了金学铁最后在去韩国的相关情况。

2001년 4월 29일, 항일독립군에 관한 책자를 전문 퍼내고 있는 서울 고구려출판사 이보은 사장이 남영전에게 문득 편지를 보내왔다. 사연인즉 6월 5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조선의용군 참모장이었던 석정 윤세주 열사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지기로 했으니 중국에 계시는 조선의용군 출신 김학철, 최채 두 분 선생님을 초청하오니 참가여부를 확인해 주십사 하는 내용이었다. 남영전은 최채, 김학철 두 분께 전화를 드렸는데 최채는 신체 상황으로 참석할 수 없고 김학철은 석정 선생에 관한 행사는 간다고 알려줘.라고 했다.

2001年4月29日,专门出版抗日独立军小册子的首尔高句丽出版社的李宝恩(音)社长突然给南永前写了封信。主要事由是6月5日在庆尚道的密阳市内将举行纪念朝鲜义勇军参谋长石亭(音)、允世洙烈士诞辰100周年的活动,准备邀请在中国的朝鲜义勇军出身的金学铁和崔采两位老师参加,拜托他确认一下参加与否,南永前给金学铁和崔才两位老师打了电话,崔才由于身体原因无法参加,金学铁说“麻烦转告一下,石亭老师的相关活动我一定会参加”

마침 남영전도 부산에 일이 생겨 그는 장춘에서 부산 김해공항으로, 김학철은 아들 해양과 함께 심양공항에서 부산으로 가는데 공식 일정이 끝나면 서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으나 일정이 서로 어긋나 남영전이 먼저 귀국했다.

正好当时南永前有事要去釜山,他从长春坐飞机到金浦机场,金学铁和儿子海洋一起从沈阳机场出发去釜山,二人约定纪念活动结束后,一起在首尔见面,但是二人的日程最终还是错过去了,南永前就先回国了。

한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김학철은 6월 3일 밀양시 북부면 제대리 야산의 가파른 산기슭에 모셔진 박차정 여사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박차정 여사는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의 부인으로서 당시 김학철 등을 동생처럼 아껐고 김학철 또한 그녀를 누님처럼 따랐다. 이 날 박차정 여사의 묘소에서 김학철은 김원봉 대장의 막내 동생 김학봉(69세), 박차정 여사의 조카 박의영(54세)씨 등 유가족을 만났다. 김학철은 박차정 여사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据韩国媒体报道,6月3日,在庆尚南道密阳市府北面堤大里野山的一个陡峭的山脚下,金学铁参拜了朴车静(音)女士的坟墓,朴车静女士是朝鲜义勇军队长金元峰(音)的夫人,当时,她把金学铁如同弟弟一般爱护,金学铁也把她当做姐姐。这天,在朴车静的墓地,金学铁见到了金元峰队长的小弟弟金学峰(69岁),朴车静女士的侄子朴义勇(54岁)等遗属。金学铁在朴车静女士的墓地前,泪如雨下。

누님! 제가 부하로서 약산 선생을 잘못 모셔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앞으로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에서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하직인사를 드리고 산을 내렸다.

姐姐,我没有服侍好先生,导致他悲惨过世,不知道何时再来此地,愿在天国平安。”鞠了一躬,然后下山了。

6월 4일 김학철은 밀양시 시청에서 그의 저서 사언회를 사겼고 조선의용대에 관한 초청강연을 했다. 그는 조선의용대의 혁명의 메카인 밀양을 정신적 고향이라고 생각해왔다. 평생 방문하고 싶었던 밀양을 찾았고 대장의 유가족까지 만났으니 이제는 소원을 풀었다. 감개무량해 했다.

6月4日,金学铁在密阳市政府召开了他的著书签售会,并做了关于朝鲜义勇军的演讲。他无限感慨地说,“我一直把革命麦卡锡(?)的密阳当做精神的故乡,今天我终于来到了这一生都魂牵梦绕的地方,见到了队长的遗属们,这个愿望终于实现了。

6월 5일 김학철은 석정 윤세주 열사 탄신 100주년 기념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고 다음 날 서울로 올라갔다.

6月5日,金学铁参加了石亭允世洙诞辰100周年纪念国际学术会议,第二天去了首尔。

6월 하순, 김학철은 한국에 간지 20여 일, 되었지만 연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남영전은 근심 끝에 김학철 댁에 전화를 걸었는데 선생님 무인도 전혀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6月下旬,虽然金学铁来到韩国已经20余天了,但是依然没有回延吉,南永前担心金学铁的情况,给他们家打了电话,他的夫人也说不晓得

얼마 『연변여성』 잡지사 전임 사장 방민자 여사가 남영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금방 서울을 다녀왔는데 김학철선생께서 서울적십자병원에 입원한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찾아가 뵈었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남영전이 급히 국제전화를 걸어본즉 김학철선생은 내시경검진을 받다 식도가 파열되는 바람에 근 20일 식사도 못하고 영양제주사로 계신다는 소식이었다.

不久,《延边女性》杂志社的前任社长方敏子(音)女士给南永前打来了电话,刚从首尔回来,在报纸上看到了金学铁先生在首尔红十字会住院的消息,她前去探病,并得到了金学铁先生的电话。南永前很快拨打了国际电话,得知金学铁先生做了内视镜检查时意外食道破裂,近20天不能进食,只能靠注射营养剂维持生命。

8월 29일 김학철은 80여 일 동안의 입월치료를 받고 연길로 돌아왔다. 병원 측의 불찰로 식도파열이 생겼고 근 석 달이나 고생했지만 김학철은 아들 해양더러 병원 당국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라고 했고 병 치료를 알선하신 서울적십자협회 서영훈 총재에게는 김포공항을 떠나기 직전 작별 인사를 드리라고 했다.

8月29日,金学铁结束了80多天的住院治疗,回到了延吉,由于医院方面的不小心,导致食道破裂,近3个月的时间饱受煎熬,但是金学铁依然让儿子海洋感谢医院,因为医院住院的事情,首尔红十字会总裁徐英勋(音)帮忙斡旋。他嘱咐儿子离开金浦机场之时,要向徐先生表达离别的问候。

마지막 스무하루의 낮과

最后20天的昼夜

김학철은 연길에 돌아왔으나 건강을 여전히 회복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스무하루의 낮과 밤을 아들 해양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金学铁虽然回到了延吉,但是健康状况依然没有得到恢复,儿子海洋是这样记录父亲生命最后20天的日日夜夜的。

이천일년 구월 이십칠일

二零零一年九月二十七日晚

달도 유난히 밝았다. 달빚아래 두만강은 은빛으로 빛났다.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물결은 지칠 줄 모르는 한 영혼을 싣고 저 멀리 동해 바다로 떠나간다. 말없이, 끊임없이.

月亮格外地明亮,月光之下,图门江的银色光芒也格外耀眼,悠悠流淌的图们江的水波载着一颗不知疲倦的灵魂,朝遥远的东海走去。无言,亦无停歇。

두만강 가에서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을 보내면서 눈물 섞인 소리로 소용히 불렀다.

在图们江边,静静地为朝鲜义勇军最后的分队长送行,哭声静静地呼唤着。


아버지

爸爸

지금 이렇게 두만강까지 왔습니다.

就这样,我们来到了图们江边。

아버지가 바라시던 대로 이제 두만강 강물에 실려 멀리 넓은 바다 아버지의 고향인 원산 앞바다로 보내드리겠습니다.

正如爸爸您所期待的,现在马上就要乘着图们江的江水,把您送到故乡元山的前海。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으로서 오늘 길을 떠나가십니다.

以朝鲜义勇军分队长的身份今天上路。

아버지가 여기 오시기까지는 너무나 파란만장하고 격정적인 세월이 흘렀습니다.

爸爸走到今天,经历了无比波澜壮阔又饱含激情的岁月。

상해와 남경 반일 테러활동을 하실 때엔 류자명선생의 부하로서, 무한 조선의용대 시기엔 김원봉선생의 부하로서, 태항산 조선의용군에서는 김두봉선생의 부하로서 총을 들고 싸우셨습니다.

在上海和南京进行刺杀日军活动时,爸爸是刘子铭先生(音)的部下,武汉朝鲜义勇队时期是金元峰(音)先生的部下,在太行山当朝鲜义勇军的时候是金斗峰先生的部下,在他们的带领下,拿起枪杆子与敌人战斗。

그후 일본군에 의해 다리를 잃으시고 부득이 총을 붓으로 바꾸시었습니다. 그리고는 줄곧 오늘까지 그 붓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后来与日军战斗时失去了一条腿,不得以从文。直到今天都没有停下手中的笔杆子。

오늘 붓을 함께 보내드립니다.

今天我把那支笔一同给您送过去。

떠나실 아버지는 정말 행복하시다고 하셨습니다.

离开的时候,爸爸说真的很幸福。

아버지는 일생을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상의 그늘 밑에서, 노신의 불굴의 의지로써 살아오셨습니다.

爸爸一生都在马克思和恩格斯的思想熏陶之下,以鲁迅的不屈的意志顽强地活了下来。

전우들을 전쟁터에서 잃으시고 먼저 보내시고 붓으로 그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로써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他在战争中失去了战友,他将他们送走,用笔将他们的事迹告诉了天下的百姓,因此,他说他感到很幸福。

또한 성실하고 용감한 우리 조선민족의 문인들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분들을 대표하여 오늘 이 자리에 십여 명 문단의 전우들이 모였습니다. 그로써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能够和认真而又勇敢的朝鲜族文人们一起工作。作为他们的代表,今天能够在此与十几位代表朝鲜族文坛的文人们聚在一起,因此,他说他感到很幸福。

마지막으로 아들과 손자가 성실하게 자라서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最后他说能看到儿子和孙子茁壮成长,他说他感到很幸福。

자리엔 어머니와 손자와 손녀가 오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떠나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것입니다.

今天妈妈和孙子孙女都没有来,但是和爸爸一同照的照片,能目送爸爸最后的离去

일생을 고생하신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고 계십니다.

劳苦一生的妈妈现在正向爸爸招手。

손자 시월이 그놈이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孙子十月正朝着爸爸挥动着小手。

아버지, 이젠 그 고독한 고달픈 인생을 잊으시고 편히 다녀가십시오.

爸爸,现在请忘记那孤苦的一生安心的走吧。

멀리 할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가십시오.

去我远方的奶奶所在的故乡。

아들 해양 이천일년 구월 이십칠일

儿子海洋 二零零一年九月二十七日

마지막 스무하루의 낮과

最后二十天的日日夜夜

9월 5일 수요일

9月5日星期三

  미음조차 속에서 받지 않는다. 석 달 동안 지속된 주사도 지긋지긋 하시단다. 서울적십자병원에서 보내주기로 약속된 병지도 종시 오지 않는다. 입원치료의 기회를 놓치신 듯하다.

如今连米汤都无法咽下去。三个月的治疗,反反复复的注射,厌倦透了,首尔红十字医院说会给我们寄来病志,始终也没收到,好像已经错过了入院治疗的最佳时期了。

하루도 한시도 일을 못하시면 안달하시는 성격에 달이란 참으로 지옥 같은 참지 못할 생활이라고 하셨다.

每一天,每一刻不工作就很不舒服的父亲来说,三个月的时间如同地狱一样难熬

친필로 유서를 작성하셨다.

亲笔写下了遗书。

남기는

留言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为了减少社会的负担

为了减轻家庭的痛苦

我打算舍弃眷恋

彻底离开

김학철

金学铁

병월? 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医院?绝对拒绝注射

让我安静离开

9월 6일 목요일

9月6日 星期四

하필이면 고통스럽게 물까지 마시지 않으시렵니까?

怎么连水都不肯喝呢?您这是多么痛苦啊!

애타는 권유에 보리차를 드시고 기분이 무척 좋으셨다.

在我苦苦的劝诱下,他终于喝了杯大麦茶,情绪也变得好多了。

서울에서 이번에 출판한 산문집 『우렁이 같은 세상』십여 권에 사인을 하셨다. 증정하실 책들이다. 받으실 분들로는 『은하수』 金宇선생/ 연변대학 연구소 金东勋선생/ 연변대학 조문계 金虎雄선생/ 작가협회 金学泉선생/ 연변일보 문화부 李任선생/ 연변인민출판사 李成선생/ 『연변문학』 志敏선생/ 사회과학원 金宗선생/ 『장백산』 南永前선생/ 『도라지』 高信一선생/ 요녕민족출판사 俊基선생님이시다.

在首尔出版的散文集《像土螺壳里面一样的世界》上,他给10多本书签了名子,这些书是他要赠予的书。他要把书送给《银河》金声宇老师/延边大学研究所金东勋老师/延边大学朝文系金虎雄老师/作家协会金学泉老师/延边日报文化部李任远老师/延边人民出版社李成权老师/《延边文学》张志敏老师/社会科学院金宗国老师/《长白山》南永前老师/《桔梗》高信一老师/辽宁民族出版社郑俊基老师(以上人名音译)

9월 7일 금요일

9月7日 星期五

작가협회 김학철선생, 손문혁선생 두 분을 집으로 부르시었다. 조직과의 마지막 담화이시다.

爸爸把作家协会金学泉(音)先生,孙文革(音)先生请到家里来,这是和组织的最后一次谈话。

이십여 동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시었다.

20多分钟的时间里,他们进行了坦诚的对话。

김학철선생의 인격과 조직능력, 작가협회 여러분들이 몇 해 동안 꾸준히 추진해온 사업들을 충심으로 평가하시었다.

对金学泉先生的人格和组织能力,作协对这几年所付出的努力,给予充分的肯定。

우리 민족 문단의 세대에 희망과 신심을 갖고 계셨다. 문학의 불씨를, 굳센 붓을 넘겨주고 싶으셨다.

他对我们文坛的新一代充满信心和希望。想把文学的火苗,坚硬的笔杆子转交给他们

『연변문학』에 언급하시면서는 작가협회 기관지로서 없어서는 『연변문학』은 장기민선생의 정력적인 활동으로써 유지될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잡지사 조성희 선생은 그의 아버지 조득현선생님과 친분이 깊으실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성장을 지켜보셨고 사랑해주셨다.

提到《延边文学》的时候,爸爸说它是作家协会不可或缺的重要机关报。在张志敏先生的敬业精神之下才得以维持。还有爸爸与杂志社的赵成姬的父亲不仅有很深的交情,而且小的时候看着她长大的,很是疼爱他。

『연변문학』-『천지』와는 참으로 오랜 세월 생사고락을 함께 하시었다.

《延边文学》-《天地》真是一起同甘共苦,经受了岁月的洗礼。

9월 8일 토요일

9月8日 星期六

하루중일 물도 드시었다. 물을 마시면 한참이나 호흡하기 힘드시다. 고통스러웠다. 식사를 전혀 못 하신지도 나흘째.

一天始终一口水都没有喝,喝了水的话呼吸很是困难,很痛苦,已经4天没有进食了。

오늘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었다.

今天一起聊了很多的话。

나는 일생을 허위와 신격화를 반대해 싸웠다. 모택동의 개인숭배도 포함해서.

我一生都反对虚伪和神化,包括毛泽东的个人崇拜在内。

사회주의는 중국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러할 힘도 권위도 있다. 하지만 20세기에서 서둘러 최종 완성하려 했던 것이 문제로 됐다. 사회의 발전은 인위적인 요소가 아니라 법칙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다. 일당 독재도 문제가 있다. 서로 견제하고 감독할 세력이 있어야 한다.

社会主义会终究要实现的。马克思和恩格斯的思想理应受到尊敬。确实有这样的力量和权威。但是要在20世纪最终能够实现的观点是操之过急的想法。社会的发展不是由人为决定的,而是有其自身的发展规律的。(“一党独裁”论目前在我国还是不提为好,可以省略)

오후 한국 염인호교수의 부탁으로 조선의용대창설 기념사진에서 전우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셨다.

下午,应韩国严仁浩教授之托,开始整理朝鲜义勇军队创设纪念照片上战友们的名字。

침대에서 책상 걸상으로 안아 옮겨드렸다. 확대경을 힘겹게 드시고 콩알 크기의 얼굴에서 옛 전우들의 모습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63년 전의 사진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구십 여명의 대원중 얼굴이 많이 가려진 두 명 외에 이름을 전부 확인하셨다. 그것도 별명까지. 이름을 받아 쓰면서 몇 번 나누어 작업하자고 권유했지만 언제 기력을 잃을지 모른다 하시며 끝까지 견지하셨다. 절단된 다리 때문에 균형을 잃어 몸이 자꾸 한쪽으로 쏠렸다. 아픈 눈을 비비시고 또다시 확대경에 달려드셨다. 옆에서 지겨보느니 흐르는 눈물을 속으로 삼키었다. 이 일을 내가 안하면 영원히 역사의 퀴즈(수수께끼)가 될 것이야.

我将爸爸从床上扶到了桌子前面的板凳上坐下来,他吃力地拿起扩大镜,如同黄豆小的脸庞上认出战友并非易事,这是63年前的照片,但是人的记忆力真是非比寻常,着实让人感到吃惊。在90名中,除了2名脸被遮住的除外,其他所有人的名字都确定了下来。甚至连外号都记得。他一一记下姓名,我劝他歇一会儿再写,他说不知道什么时候就没有力气了,一直在坚持。由于一双腿断了,所以可能是失去平衡的缘故,身体总是向一边倾斜。累了就揉揉发痛的眼睛,又重新拿起放大镜。我在旁边看着,强忍着泪水。这件事情如果我不做的话,永远会成为历史之谜。

침대에 옮겨 누우신 오랫동안 말씀을 못하셨다.

给爸爸移动到床上之后,他久久没说话。

9월 9일 일요일

9月9日 星期日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후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谈到了马克思和恩格斯之死。

마르크스는 영국 하이게이트공동묘지에 검소한 무점 하나뿐이다. 엥겔스는 그나마 묘지조차 없다. 친우들에 의해 골회 함은 영국 남쪽 도버해협에 해장됐다. 나도 엥겔스처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게 해 달라.

现在只有一处马克思的公墓,很朴素的墓地,也就是英国的海格特公墓,恩格斯连公墓都没有。他嘱咐朋友将骨灰投在英国的多佛尔海峡海葬,爸爸嘱咐我说他也要像恩格斯一样不留痕迹。

9월 10일 월요일

9月10日 星期一

남영전선생이 장춘에서 찾아오셨다. 장춘병원으로 모시고 가려 한 것이다. 단연 거절하셨다.

南永前老师从长春赶来了。他想把爸爸转到长春医院,当然拒绝了他。

『장백산』과 인연이 깊다. 자연히 남영전선생과도 그렇고. 『장백산』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다. 우리 문단이 그 누구에게도 못하지 않은 대오가 되기 바란다. 그전두에 『장백산』이 힘차게 서 달라.

爸爸和《长白山》有很深的缘分,自然和南永前先生有很深的交情,他对长白山给予了很高的希望,希望能够成为我们文坛的佼佼者。他期望《长白山》能够努力站在前列。

이번 병환으로 쓰러지시기 전까지도 『장백산』 보내실 원고를 쓰셨다. 끝까지 붓을 놓지 않으셨던 것이다.

在这次病倒之前,他还写了稿件寄给《长白山》,自始至终笔耕不辍。

남영전선생을 보내시면서 아껴 쓰시던 손목시계를 벗어주셨다. 남영전선생이 그 뜻을 알겠노라고 눈물을 흘렸다.

送南永前出门的时候,爸爸把手上的手表拿了下来递给了他,南永前知道了爸爸的用心,泪水流了下来。

많은 풍과를 같이 겪었던 『장백산』

共同经历风波的《长白山》

유서를 타자하게 하시고 다섯장에 일일이 서명을 하셨다.

写了遗书,然后打印的,一共15张,每张一一签了字。

유서에는 마지막으로 마디가 첨부 되였다.

遗书的末尾,附上了两句话:

편안하게 살려거든 不义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要想过安逸的生活,请避开不义

然而要想像人一样活着,就请挑战不义。

9월 11일 화요일

9月11日星期二

오늘 커피스푼으로 한술한술 조심스레 입에 물을 넣어드렸다. 호흡과 충돌이 생기면 등을 뚜드려드렸다. 하루에 물 세 컵. 성적이 좋았다.

今天用咖啡勺小心翼翼地向爸爸的嘴里喂水,呛着的时候,就捶爸爸的肩膀,一天三杯水,成绩不错

작가협회 손문혁선생과 단둘이 다방에서 만나 후사에 관한 아버지의 뜻을 전하였다.

我和作家协会的孙文革两人在茶馆,商量爸爸的后事。

부고를 내지 않는다

추도식을 하지 않는다

일체 부조금을 받지 않는다

화장한 두만강에 뿌려 달라

골회함 대신 우체국의 종이 우편박스를 사서 담아라. 일부 남은 것을 그대로 담아 두만강에 띄워 보내라. 우편함엔 다음과 같이 써주기 바란다:

不发布讣告,

不举行追悼仪式,

不接收随礼金,

火葬后将骨灰扔到图们江里,

骨灰不要放在骨灰盒里,从邮局买邮寄纸盒,将剩下的一部分放在里面,扬到图们江里,在邮寄盒子上,请写上如下文字:

원산 앞바다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元山前海

金学铁 (洪性杰)的故乡

亲戚朋友送行

마지막 가는 길에서는 조선의용군추도가와 황포군관학교 교가를 불러 달라.

最后,在送行的路上,爸爸嘱咐我们唱朝鲜义勇军追悼歌曲和黄埔军校的校歌。

두만강까지 가실 분들로는 작가협회 김학철 김호근 손무혁/ 출판사 리성권/ 신문사 장정일/ 잡지사 조성희/ 과학원 김종국/ 대학 김호웅/ 외지 남영전/ 친우 장일민 조룡남 박찬구 선생 등 열두 분.

前往图们江送行的人员有作家协会的金学泉、金浩根、孙文革/出版社李胜权/报社的张正日/杂志社的赵成姬/科学院的金钟国/大学金虎雄/外地南永前/亲友张一民、赵龙男、朴赞久等12位

아버님이 전쟁터에서 쓰신 구절이 생각난다.

我想起了爸爸在战场上曾经写下的诗句

소나기 퍼붓는 영마루에서

내일 솟을 태양을 우리는 본다.

夜晚雷雨飘摇的山顶上

我们看到了即将升起的太阳

9월 12일 수요일

9月12日 星期三

미국에서 일어난 인류 역사상 최대의 테러비극을 뉴스화면으로 목격하셨다. 오랫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시었다.

亲眼在新闻上看见了发生在美国的历史上最大规模的恐怖袭击,心情许久不能平静。

가기 전에 이러한 비극을 보고 떠나야 하다니, 탈레반과 빈 라덴은 철저한 응징을 받아야 한다.

走之前竟然看到这样的悲剧,塔利班组织本拉登一定要接受严惩。

연변인민출판사 리성권 선생을 만나시었다. 리성권 선생이 『아리랑』에 계실 때부터 아끼시었다. 출판사가 힘든 사정에서 『문집』(김학철문집)을 내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걱정하셨다. 리성권 선생은 『문집』 제5권이 곧 출판될 것이니 꼭 보셔야 한다고, 침대에 엎드려 손을 잡고 울었다. 성권이 차로 두만강까지 데려다 달라고 후사를 부탁하셨다.

到延边人民出版社的李胜权先生。李胜权老师在《阿里郎》时开始,爸爸非常关心。出版社陷入困境,在这种形式下,爸爸还担心出版《文集》(金学铁分集)会不会困难,李胜权老师说《文集》第5卷即将出版了,让爸爸一定要看,他趴在床上,抓住爸爸的手,大哭了一场。爸爸拜托胜权把自己送到图们江,也就是托付了后事。

리성권 선생을 보내시면서 쓰시던 파크 불펜을 주셨다. 방문을 닫고 한참이나 유리 너머로 최후의 작별인사를 하는 리성권 선생,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送走李胜权老师的时候,我把爸爸曾经用过的派克笔送给了他。李胜权老师关上房门后,透过玻璃窗,与爸爸做最后的离别问候,很久很久,泪眼朦胧。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의 회사에 취직한 손자 友情이가 돌아왔다. 갓 취직한 회사 일에 지장이 된다고 절대 불러오지 못하게 하셔서 손자는 부득불 길림지사로 출장 오는 길에 들렸다고 했다. 꾸중은 면했지만 가슴은 아프다.

今年孙子友情从大学毕业,在北京的一家公司就职,他回来了。他刚上班,父亲以为耽误公司的事情,绝对不允许叫他过来。不得已借着到吉林省出差的路上,回了家。虽然不再有人责备他了,但是心很痛。

할아버지께는 없는 위안이 되셨다. 속으로는 얼마나 보고 싶어 하셨던 손자이던가.

爷爷终于能得到内心的安慰了,他内心格外惦念的孙子终于回来了。

9월 13일 목요일

9月13日星期四

장정일선생과의 약속을 되새기셨다.

父亲回想起和张正日先生的许诺

내년에는 추리구감옥에 한번 가보기로 했는데.

明年要去看一看秋梨沟监狱。

당시 간수의 말이 생각났다. 다른 늙은이들 퍽퍽 쓰러져나가는데 당신 아버지는 일 년 내내 냉수마찰로 살아남았다.

想起了在监狱时看守的话,其他人都倒下去了,你的爸爸一年一直用冷水摩擦,坚持活了下来。

장정일선생님은 해마다 가을 동생분의 차로 모시고 산으로 들로 소풍을 가셨던 것이다. 그렇게도 시간을 아끼셨는데 장정일선생님이 가시자면 꼭 따라 나서시는 것이 참 이상한 일이였다.

每年春秋的时候,张正日老师都陪着爸爸去山川原野野炊,那么爱惜时间的人只要张正日老师张罗去,从来都是跟着出去,这也是件挺奇怪的事情。

사회과학원 김종국선생께 책을 보내드렸다. 선생은 외지에 나가시고 부인께서 받으시었다.

送给社会科学院的金钟国老师一本书,由于老师去外地了,他的妻子替她接收的。

리상각선생이 전화를 받았다. 몹시 근심 어린 목소리시다. 전에도 늘 전화하시고 찾아오시어 건강을 관심해주셨다.

接到了李相钰先生的电话,老师的声音充满了惦念,以前也总是打电话,来我家串门,询问爸爸的身体情况。

읽기와 쓰기에 게으르다고 꾸지람을 들었다.

责怪我阅读和写作上很不勤恳

학문이란 노력이다. 나나 고리키나 다 자습밖에 더 있었느냐? 흥명희의 임꺽정을 외우다시피 했다. 어느 구절이 어디 있는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흥루몽과 노신전집은 또 몇 번이고 읽었더냐. 오직 노력뿐이 사는 길이다. 내 일본어실력을 너에게 넘겨주고 가지 못하는 것이 참 유감이구나.

做学问实际上就是靠努力我或者高尔基除了自学努力还有别的办法吗?我把洪明熙的林巨正似乎都能背诵,哪个句子在哪页现在都清楚记得。红楼梦和鲁迅传记都不知道读了多少遍了,只有努力才是成功之道,我的日语水平不能传授给你真感觉遗憾。

9월 14일 금요일

9月14日星期五

일본 와세다대학 오무라교수 내외분께서 오시겠다고 전화가 왔다. 참으로 오랜 기간 두 집 사이에 우의를 지켜 오신 분들이시다. 일본을 방문하셨을 때도 늘 동반을 하시었다.

日本早稻田大学的教授大村夫妇打电话,说是要过来。他们和我们家的交情甚深,已经认识很久了,去日本的时候,他们夫妇也总在身边陪伴。

미리 집밖 마당에서 맞이하고 정황을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말없이 땅만 내려다 보시고 부인께서는 소리 내어 우셨다. 참 하늘 이 두 분을 때마침 보내주신 모양이다.

我提前到院子里迎接了他们,说了爸爸的近况,教授低下了头,看着地面,他的妻子放声痛哭,似乎上天眷顾,刚好把他们送来了。

오무라선생께서는 방에 들어서서는 웃음을 지으셨다. 서로 여유 있는 농담을 나누시었다. 참 넓은 마음들을 가지고계시지 않는가.

进了房间之后,大村老师面带着笑容,还开起了轻松的玩笑,他们的心胸是那样的宽广。

정판룡선생과 죽음시합을 하는 모양이요. 그 사람 인물이지. 도량이 넓고.

我和郑判龙先生正在进行死亡比赛呢,那人可真是个人才,有度量。

오무라선생이 시합에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라고 농담을 받으시고는 잡은 손을 쓰다듬이시며 손으로 얼마나 많은 글을 쓰셨습니까 라고 한탄하셨다. 오무라선생 내외분과 함께 찍은 사진이 일생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이 되였다.

大村老师开玩笑地说,在这场死亡比赛中,输的一方就是赢家他抓着爸爸的手,感叹道,这双手写了多少字啊。和大村夫妇一起照的照片成为最后的一张合影照。

9월 15일 토요일

9月15日星期六

손자 우정이가 큰절을 드리고 떠나갔다. 대견해 하시면서 섭섭해 하시면서 애써 표정을 감추시었다.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는 것을 의식하시는 듯싶다.

孙子友情做完跪拜礼后离开了,爸爸感到很自豪,但也很难过,强忍住难过的表情,似乎已经意识到一切都要结束了。

한국에서부터 밀착촬영을 조천현기자가 마지막 방문촬영을 하였다. 한국 기자들의 끈질긴 사업정신은 정말 놀랄 만 하다.

贴身录像的赵千贤(音)记者也从韩国赶来,进行最后一次的拍摄。韩国记者执着的敬业精神着实让我佩服

9월 16일 일요일

9月16日星期日

드셨다.

喝了三杯水。

 「조선의용군 추도가」와 「황포군관학교 교가」를 들으시었다.

听了《朝鲜义勇军追悼歌》及《黄埔军校校歌》。

추도가는 전쟁터에서 가사를 쓰시고 가장 친한 전우 류신동지가 작곡하여 전우들이 희망됐을 불렀던 노래다. 한데 호가장전투 후 김학철 등 다섯 명(실은 내명)의 전사자들은 위한 추도식에서도 이 추도가를 불렀다. 총을 맞아 일본군에게 끌려가셨는데 당시 정우들을 전사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류신이가 훗날 먼저 전사하셨다.

追悼歌是在战场上写的,由亲密的战友刘新同志作曲,这是战友们牺牲的时候唱的歌曲。后来在胡家庄战役后,也为战死的金学铁等五位(实际上是4位)战士演唱了这首歌曲。这是由于爸爸当时负伤后被日军带走了,战士们以为金学铁已经战死的实际上刘新是比父亲先战死的。

작가협회 손문혁선생과 장춘 남영전선생의 전화가 날마다 들이닥친다. 손문혁선생 전화는 지어 하루에 두 번이다. 김학철선생의 부탁이었다. 어려운 나날에 힘이 되였다. 가슴속 깊이 뜨거운 정을 느꼈다.

作家协会的孙文革老师和长春的南永前老师每天都打来电话,孙文革每天打两遍,这是金学铁老师的嘱托,听到孙老师的声音,能够在这难熬的每一天中,获得力量,能够感觉到心底的情怀。

식구들을 부르기가 함드시다고 손으로 흔드는 종을 얻어오라 하셨다. 며누리가 학교 악대에서 쓰는 작은 손중을 빌려왔다. 며누리가 효도하누나 칭찬하셨다.

有事喊家人过来越发困难了,就让我们弄来可以用手摇晃的铃铛来,儿媳妇从学校乐队借来了小的手铃铛,爸爸直夸她真是孝顺的儿媳妇。

9월 17일 월요일

9月17日星期一

오늘부터 물을 드신다. 못 드시는지 안 드시는지 판단이 안 간다.

从今天开始,就喝不了水了,但我无法判断是喝不了还是不愿意喝。

침대에서 하릴없이 누워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야. 주사 따위를 맞으면 몇 달은 더 살겠지. 하지만 글도 못쓰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만 주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단축해야 한다.

在床上无所事事地干躺着是一件多么痛苦的事情,大概不会有人能懂得。如果能接受注射治疗的话,还能多活几个月,但又写不了文章还有什么意义呢?只能给别人增添负担,应该把这样痛苦的日子缩短。

채택룡선생은 일생 고생은 하셨지만 가실 때는 복스럽게 가셨다.

蔡泰龙老师虽然命运多舛,但是走的时候却很富态安详。

어머니와 나를 불러놓으시고 다시 확인하시였다.

爸爸把我和妈妈叫到床前,再次嘱咐一些事情。

혼미상테에 들어간 절대로 의사를 부르거나 주가를 놓지 말라. 고통을 인위적으로 연장하지 말라.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내 고통으로 천여원 월급을 더 타먹으려는 비열한 것이다. 내 아들답게 용감하게 성실하게 처사하라.

进入昏迷状态之后,绝对不要叫医生或者要求注射,不要人为地延长痛苦,硬是延长我的生命,就是在用我的痛苦来吞没我的一千余元工资的卑劣行径。作为我的儿子,应该诚实勇敢地处事。

9월 18일 화요일

9月18日星期二

나는 행복하다. 그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했다. 아들 손자 다 성실히 잘 자랐고, 집에서 침대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조용히 가게 해 달라.

我真的很幸福,在激烈的战场上活下来,想要做的事情都做了。儿子和孙子都长大了。能在家里的床上离世真的是很幸福,让我静静地走吧。

9월 19일 수요일

9月19日星期三

한밤중에 갑자기 나를 불러다놓고 하시는 말씀

오직 손자에게 미안하다. 손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이 한이 된다.

一天夜里突然叫我过来。

只是觉得愧对孙子,让孙子伤心了更觉得是个遗憾。

9월 20일 목요일

9月20日星期四

박찬구선생을 소개하는 나의 결론 구술.

口述介绍朴赞久(音)老师的“我的结论”

박찬구선생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讲起了朴赞久老师

반우파운동으로 도서관직이를 하실 일이다. 식량이 부족해 다들 배를 곯는 시기다. 외다리를 해가지고 양식 구하려 다닐 수도 없는 형편에서 소학교 삼사학년에 다니는 외아들을 좀 더 먹이려고 날마다 점심을 굶으시었다. 당시 문화처 과장으로 일아시던 박찬구선생이 몇 번 책 가지러 오셨다가 우연히 발견하시고 도시락을 둘씩 싸가지고 오셔서 나누어 드셨다. 그 당시 우파분자를 동정해 점심을 나누어 먹는 일을 남이 알면 철직은 둘째고 당사자도 우파분자로 투쟁 맞을 형편이다.

那是在反右派斗争的时候,在图书馆任职,食粮不足,大家都饿着肚子的时期,失去了一条腿,想要去找粮食也走不了路。有吃的还要让给小学三四年级的独生子,所以几乎每天中午都不吃饭,当时文化处的科长朴赞久带来了几本书,说是无意中发现这一情况,出去打包了两盒盒饭分着吃。当时如果同情右派分子,把中午饭分给他们吃的事被人家发觉,是要撤职的是小事更严重的是当事人也要被当成右派分子被批斗的

훗날 일을 평생 잊지 않으셨다.

后来,这件事情他一直都记得。

장일민선생님께서 전화가 왔다. 벌써 다섯 번째이다. 만나지 않겠다면 안 만나마. 그러나 왜 입원을 안시키는거냐! 분노의 목소리였다.

张日民老师来电话了,这已经是第五次电话了,如果不见的话就算了,但是为什么不让住院呢,声音有些愤怒。

평일 아버지와 전화연락이 제일 많은 친구 분이시다.

他是平时和爸爸联系最频繁的朋友。

9월 21일 금요일

9月21日星期五

  머리를 아주 빡빡 깎으시겠다고 하신다. 농담조로 최후의 분대장 머리 깎고 조선의용대에 북귀한다고 하셨다. 전우들이 다 가있는 곳으로 말이다. 깎으신 머리에 처음 보이는 칼자국이 나타났다. 문화혁명시기 흥위병들이 쇠몽둥이로 쳐서 머리가 터진 자국이라 하셨다. 그 때 온몸이 피투성인데 약 하나 발라주는 사람 없었다. 피가 말라 붙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외다리로 절름거리며.

爸爸说要把头都剃个精光,开玩笑说要剪成最后分队长的发型,然后回到朝鲜义勇军的队伍里,去战友们呆的地方。理发的时候,我第一次看到了伤痕,这是文化大革命时期,红卫兵们用铁棍打的,留下的疤痕。当时全身都是血,但是没有一个人来给敷药。只能等血干了为止。腿还是一瘸一拐的。

일본 감옥에서의 이야기도 나왔다.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 해서 부상당한 다리를 치료해주지 않았다. 삼년 또 육개월 동안 피고름을 흘리면서 독방에서 지내야 했다. 상처에 생기는 구더기를 젓갈로 골라내노라니 참 고된 인생 이였지. 결국은 감옥장이 바뀌면서 해방 전야 다리를 절단하였다. 그로써 60년 동안 외다리인생이 되였다.

还讲到了在日本监狱时的故事,如果不写悔改书的话,不给治疗受伤的腿。三年零六个月的时间,在牢房里忍受着脓血不断流淌。在伤口处生出的蛆还要用筷子剜出去,真是痛苦至极,最后换了监狱长,解放前夕,将那条腿截断了。从此过了60年的一条腿的日子。

잘린 다리는 일본 감옥에 묻혀있다. 그러니 나는 무덤이 이미 하나 있는 신세구나. 하하하.

被截去的一条腿埋在了日本监狱,所以我已经是有了一个坟墓的人了,哈哈哈。

집에서 깨끗이 목욕을 시켜드렸다. 여원 몸은 아프리카 난민을 연상시킨다. 내가 가슴 아파하자 강 건너에선 사회주의 반세기에 굶어죽는 사람 아직도 많지 않느냐! 천하게 부모를 보내는 마음 다 같다고 격노하시였다.

在家里面给他干干净净地沐浴,消瘦的身体让人联想到非洲的难民,我心里一难受,他有些生气地说“江那边搞社会主义的半个世纪以来,活活饿死的人不是依然很多吗?天下送父母的儿女心情都是一样的。

그렇게도 사랑하던 손녀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신다. 평소의 인자한 모습을 손녀의 기억 속에 남기고 싶으신 듯하다.

然而,他那样疼爱孙女,最后也没让他到爷爷的身边看一眼。可能想要把平日里那份仁慈的形象留在孙女的记忆中吧。

박찬구선생까지 문전까지 오셨다가 만나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옛 친구들에게 지금의 모습 보이고 싶지 않으셨다. 보내시고 가슴 아파하셨다. 박찬구선생께서는 나를 끌어안으시고 눈물을 흘리시었다. 어릴 적 선생님께 심부름 갔던 일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连朴瓒九老师走到门口也没见上一面,就黯然离开了。他老人家不想给朋友们看到他现在的样子。让大家回去,然后他心里很难过,朴瓒九老师一把揽住我,抱头痛哭。隐约想起儿时帮老师跑腿的情形。

9월 22일 토요일

922日星期六

아버지를 귀국하시자마자 입원시키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후회될 것입니다.

让爸爸回国养病,没有马上让他住院接受治疗的事情让我后悔了很久。

너는 용졸한 인간이다. 내 뜻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你是一个庸俗的人,看样子自始至终都没有明白我的意思啊。

한명을 아는 것이 영웅이다.

知天命的人是英雄。

제일 힘드신 것이 목이 마르는 것이다. 물을 조금씩 입에 물었다가 조심조심 뱉어내시었다. 그리고는 어 시원해 어 시원해 한탄을 하시는 것이다.

最折磨人的是嗓子容易发干。水喂到嘴边,小心翼翼地吐出来。然后说太爽口,爽口极了。

贺龙 창살 밖의 빗물을 받아 마시다 목말라 세상을 하직했는데 내가 신세 아닌가.

贺龙接窗棂外的雨水喝,最后口干而离开人世,我现在不正是那般模样吗?

색갈이 변해가시는 외다리를 보시며 손과 발이 먼저 죽어가는구나 라고 태연 자약하게 말씀하셨다.

他看着自己逐渐变了颜色的一条腿,泰然自若地说道:原来是手和脚先死掉的啊。

9월 23일 일요일

923日星期日

유자명 선생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他对刘子铭老师这样说。

유자명 선생과는 남경 화로강시기 같이 있었는데 김원봉선생과 분이 나의 선생이자 무정부주의 의열단의 원로이시다.

和刘子铭老师是在南京花露岗时期认识的,还有金元峰老师,二人都是我的老师,也是无政府主义义烈团的元老。

해방 유자명 선생은 북조선도 한국도 없는 딱한 처지가 되셨다. 호남성 농학원에서 식물학연구를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13년 전까지 편지왕래가 있었다.

解放后,刘子铭老师陷入了既不能去北朝鲜也不能去韩国的尴尬处境。在湖南省农学院从事植物学研究,然后离世。13年以前,我们还有书信往来。

이번 김원봉, 석정선생의 고향인 한국 밀양시를 가셨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

这次,他想起了曾经去过金元峰、石正老师的家乡密阳市的事,颇感欣慰

밀양의 열정적이고 성실하고 친절한 친구분들에게, 특히는 석정선생의 후손들에게 돌아와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이젠 네가 감사의 뜻을 대신 전해야겠구나. 이번 한국행에 너무나 많은 고마운 분들을 만났다. 내가 죽으면 서영훈 선생님께 꼭 전화 하거라.

他打算给密阳的那些热情、淳朴、亲切的朋友们,特别是石正老师的后孙们写信,现在你要代我转达我的感谢之情了。这次韩国之行我见到了很多好心人,如果我死了,一定要给石英勋先生打电话。

우리 집에 은인이 한분 계신다.

我们家还有一位恩人。

일본에 계시는 姜在彦선생께서 1회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시고 제2회에 나를 추천하셨다. 늘 나를 아끼시었다. 잊지 말아라.

日本的姜在彦老师获得了第一届KBS海外同胞奖以后,第二届给予了我奖项提名。

9월 24일 월요일

924日 星期一

그렇게도 강한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但是坚强的意志力开始减弱。

예리하고 비웃는 듯한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平时锐利又带些嘲讽的目光开始模糊起来

참고 참던 눈물이 솟아나왔다. 내 눈물을 사이 두고 두 눈빛이 부딪쳤을 때 아버지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것으로 눈길을 피하신 것이다.

强忍住的泪水夺眶而出。与我目光相遇的那一刹那,爸爸闭上了眼睛,他是在躲避我的目光。

사나이는 눈물을 아껴야 했는데.

男子汉应该少掉眼泪才是啊。

9월 25일 화요일

925日星期二

음식을 드신지 스무하루, 물을 못 드신지 아흐레.

已经21天没有吃饭了,9天没有喝水了。

말씀하시기 힘드시어 손으로 의사를 표시하신다.

说话很吃力,就用手指笔划来表意。

어머니와 나를 한시도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신다. 시야에서 안보이면 자꾸 둘러보신다. 그리고 찬 수건으로 머리를 식혀 달라 하신다. 날씨는 추운데 자꾸 덥다고 하시니.

一刻也没让我和妈妈离开。如果看不到我们就经常环视四周,让我们用冷毛巾擦头部。天气明明很冷,却经常说好热。

어젯밤부터 배가 아프다고 하셔 진통제를 놓아드렸다.

从昨天晚上开始,就说肚子很疼。给他服用了镇定剂。

새벽 두시 아픔을 견디지 못하신다. 구급차를 불렀다.

凌晨2点疼得实在受不了了,叫了救护车。

연변병원에 입원하셨다.

到延边医院住院了。

아버지는 명차끝에 침만 한대 놔달라고 호소하셨다. 아픔을 참기 힘드신 것이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아무도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爸爸请求在心窝上扎一根针,实在难以忍受疼痛,但是医院无人答应他这个请求。

오후 2시

下午2

오래오래 저의 얼굴을 지켜보시었다.

盯着我的脸蛋看了很久。

아버니, 저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비록 오늘 처음 말씀드리지만.

爸爸,我爱你。虽然今天这是我第一次对你说出这样的话。

눈가에서 마지막 밝은 눈빛이 빛났다. 가시는 끝까지 의식은 한 치도 흐리지 않으셨다.

眼角最后泛出一丝明亮的目光。到离世的那一刻为止,意识保持清醒。

젖은 수건으로 아버지의 얼굴과 머리를 깨끗이 닦아드렸다. 평생을 털고 닦고, 깨끗하기를 그렇게도 좋아하셨는데.

我用湿毛巾给爸爸的面部和头部做清洁擦洗。他这一生多喜欢打理自己,干净自己啊。

오후 3시 39분

下午339

심장의 고동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는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못가고 쓰러진 나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再也听不到心脏跳动的声音

在风雨交加的路边

我的意志再也无法继续前行

希望我的意志能得到传承

我将在真理的树荫下长眠

不灭的英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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